백승종 역사학자
왕은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식탐이 있었다. 하루에 네 번씩이나 밥상 앞에 앉았던 그는 특히 육식을 즐겼다. 고기가 없으면 아예 수저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부왕(父王) 태종은 아들의 식습관을 걱정하며, “주상(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못하니, 내가 죽은 뒤 상중에도 육식을 들게 하라”고 특별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육식 때문이었겠지만 왕은 비만이 심했다.
아버지 태종은 아들에게 사냥과 산책을 주문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한때 왕의 체중이 줄기도 했지만, 27살부터는 줄곧 약을 복용하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당뇨병과 비슷한 증세가 나타났다. 나중에는 각기병으로 추정되는 질병에 걸려 걸음을 제대로 못 걸었다. 옆구리에 난 종기도 심했고, 원인 모를 풍질(風疾)까지 겹쳐 왕은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말년에는 눈병까지 도져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왕은 멀리 온천욕까지 다녀왔지만 병세는 거의 차도가 없었다.
가정적으로도 왕은 적잖은 풍파를 겪었다. 장인 심온이 부왕에 의해 제거되었고, 왕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두 며느리를 폐출하게 되는 비극을 연출했다. 휘빈 김씨는 잡술을 써서 세자(문종)의 사랑을 얻으려다 그런 사실이 발각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뒤이어 세자빈이 된 순빈 봉씨는 궁녀와 동성애를 하다 들통나는 바람에 폐위가 불가피했다. 이런 일로 인해 시아버지 세종은 신하들 앞에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달성했다.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왕은 한글을 직접 창제했고, 과학기술, 정치, 경제 및 군사 등 사실상 모든 분야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최근 여권이 문제 삼은 세종시 건설은 바로 이런 세종을 기념해, 지역간 균형발전이란 역사상의 난제에 도전한 것이었다. 뜻깊은 결정이 특정 정파 때문에 번복된다면 역사의 수치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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