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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승종의역설] 베를린장벽

등록 2009-11-13 18:32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1961년 8월13일, 동독 정권은 서베를린을 에워싼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후 독일의 분단과 미-소를 정점으로 한 냉전질서를 상징했다. 이후 서베를린은 “자유세계의 진열장”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쪽으로 가려다 동독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이가 200명가량 된다.

독일 현대사의 흉물이던 그 장벽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1989년 11월9일 밤, 동·서독 시민 수만명이 장벽의 해체에 들어갔다. 당시 나는 독일 유학 중이었던 관계로 시시각각으로 전해진 이 사건 관련 보도를 접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총리는 그 무렵의 하루하루를 “역사적인 날”이라 선포했다.

장벽이 사라지리란 징후는 그해 10월 말부터 나타났다. 서베를린의 발터 몸퍼 시장은 동베를린 공산당 간부들에게서 미리 언질을 받았다 한다. 하지만 장벽의 종말은 그의 예상보다 빨리 현실이 되었다. 운명의 날 11월9일 오전, 몸퍼는 <빌트 차이퉁>의 기자에게서 당일 중에 모종의 중대한 변화가 있으리라는 소식을 들었다. 과연 그 말대로 동독 당국은 자국민의 여행 자유화를 즉각적으로 시행했다. 환희에 젖은 시민들은 누구의 허락을 얻을 필요도 없이 역사의 흉물을 제거했다.

통독은 곧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많은 인권운동가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했고, 서독에선 빌리 브란트 총리 이후 좌파든 우파든 대다수 정치가들이 동독과의 화해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다 결정적인 시점이 되자 그들은 주변국과 강대국들을 설득했다. 영국, 프랑스 및 폴란드는 본래 독일 통일을 꺼렸지만, 결국 독일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흡수통합’은 독일 내부에 적잖은 후유증을 남겼고, 결과적으로 통일 방식에 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통일과 화해를 향한 지난날의 정책을 헐뜯는 사람은 거의 없다. 통일의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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