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역사학자
꽉 막힌 채 올 한 해가 또 저문다. 요즘 우리가 자주 꺼내는 소통이란 낱말은 라틴말에서 나왔다. ‘나누다’(communicare)란 뜻이다. 본래는 천상의 신이 인간들에게 덕성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였다. 로마 진출에 성공한 기독교회로서는 전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근대에는 이 말의 쓰임이 더욱 확대되어 지식 전달의 뜻까지 갖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의사소통을 가리킨다.
소통의 방법과 범위는 다양하다. 갓난아이는 울음으로 기본 욕구를 표현한다. 생태계의 평화 등 인류 차원의 난제는 세상의 온갖 지식을 총동원해도 잘 풀리지 않는다. 모든 게 소통 여하에 달려 있지만, 그 출발점은 언어다. 인간은 대략 20만년 전부터 말을 하게 되었다. 유전인자 하나(FOXP2)가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언어라는 무기를 손에 쥔 인간은 지구상 모든 생명체를 누르고 최강의 위치를 점했다.
언어로 재미를 본 인간은 3만년 전쯤 기호를 창안했다. 약 7000년 전부터는 문자도 사용하게 되었다. 문자화된 인간의 지식은 시공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근대에는 전신과 전화까지 발명됨으로써 소통의 기술은 세련을 더했다. 뒤이어 1980년대부터 퍼지기 시작한 인터넷은 소통의 기술적 여건을 절정으로 이끌어갔다.
그러나 소통은 여전히 미해결이다.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행동이라 그런 것이다. 진정한 소통은 문제의식의 사회적 공유를 전제로 하지만 그것부터가 어렵다. 소통이론가 위르겐 하버마스는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인간은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세상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소통이란 말인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심각한 ‘의사소통의 왜곡’이다.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자본과 권력이 일상을 ‘식민화’하고 있다. 피해 시민들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한 해를 넘기는 용산참사를 놔두고, 엊그제 사회통합위원회가 출범했다. 세상에, 소통 없는 사회통합도 있는가.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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