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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승종의 역설] 우리에게 평화를 달라!

등록 2010-12-03 20:53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고 있다. 침략군이 쳐들어오기 두어 달 전, 지천명의 문턱에선 그는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정월 19일에는 휘하사졸을 점호했고, 2월11일과 2월16일에도 신병과 근무 교대 중인 군사를 모아놓고 다독였다. 조련과 시합도 쉴 새 없어, 연초 두 달 동안에만도 세 차례씩이나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흔들리는 뱃전에서 가물가물한 적병을 조준 사격하려면 수군의 활 솜씨는 탁월해야 할 것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라는 중책 때문에 공무가 많았지만, 자주 활터를 찾았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열여덟 순을, 그러니까 무거운 활시위를 90번이나 잡아당겼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엄했다. 정월 16일에는 방답진(전남 여수시 돌산읍)의 군관과 아전들에게 곤장을 때렸다. 병선 수리에 소홀한 죄였다. 같은 날, 석공 박몽세도 여든 대나 얻어맞았다. 명줄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의 중벌이었다. 2월 보름에는 다른 석공들도 해자를 잘못 쌓은 벌을 받았다. 그보다 열흘 뒤에는 사도진(고흥군 점암면)의 군관과 아전들도 경을 쳤다. 그 첨사도 야단을 맞았다. 사도진의 장비 운영은 최악이었다. 이런 현지사정도 모르고 도순찰사와 썩어빠진 조정은 사도진 첨사의 포상을 심의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침략군이 물밀듯 몰려오자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믿을 것은 오직 이순신의 수군뿐이었다. 먼 남쪽 바다 외로운 전쟁터에서 장군이 진정 바란 것은 기록적인 연전연승의 행렬이 아니라, 조선의 참 평화였다.

지난봄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천안함의 비보를 들었다. 며칠 전에는 연평도 사태를 또 겪었다. 정부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이순신의 후예들은 허무하게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믿었던 대포는 포문이 얼어붙었다. 비상레이더는 아예 미동도 안 했다니! 아쉬운 것은 전쟁억지력이요, 원망스럽기는 평화를 뿌리내리려는 강한 의지의 결핍이다. 남북의 매파가 뭐라 짖어대든 전쟁만은 절대 안 된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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