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소학>은 15~16세기 조선의 진보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김굉필은 ‘소학동자’라 자칭할 정도로 평생 이 책을 깊이 연구하고 가르쳤다. <소학>이라면 흔히는 아이들이나 배우는 입문서쯤으로 여기지만, 실은 학자가 가야 할 바른길을 제시한 심오한 책이다. 김굉필은 소학 정신을 끝까지 추구하였기에 갑자사화에 희생되고 말았다.
평안도 희천의 유배지에서 김굉필은 자신의 깊은 뜻을 조광조에게 전했다. 청년 조광조는 스승보다 멀리 나아가, 공자가 꿈꾸던 이상세계를 현실로 옮기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로 인해 그마저 사약을 마셨다. <소학>을 신봉하던 사제지간이 모두 비명횡사한지라, 그 책은 금서 아닌 금서가 되었다. 감히 누구도 그 책을 거론하지 못했다. <소학>을 말하는 자, 위험인물이었다. 그때 ‘책파라치’ 같은 것이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목전의 실리만 탐하는 추악한 속물들이 이상주의의 씨를 말렸으니, 뜻을 뺏긴 학자들로서는 ‘책파라치’가 겁났을 것이다. 조광조와 소학의 복권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가능했다.
권력을 쥔 속물 정치가들은 이념서적은 물론 교양서적까지도 멀리한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배금주의가 서구의 독서문화를 질식시켰다고 주장했다. “계몽시대의 부유층은 앞다퉈 교양을 쌓았지만, 물질만능 풍조에 휩쓸린 현대에는 돈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교양인은 이 사회의 언저리로 밀려나 가난뱅이 교사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딱한 실정이다.” 러셀의 질책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
그래도 유럽 시민들은 책을 사랑하는 편이다. 그들은 싸구려 대중문화에 함몰되지도 않았고, 각국의 상충된 이해관계를 초월해 유럽 통합이라는 이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농담이라지만 <춘향전>을 ‘따먹는 이야기’라고 했다는 무교양한 정치인이 득세하는 개명한 이 세상! 국가적 중대사인 사교육 문제도 ‘학파라치’ 따위 알량한 카드로 풀려 한다니, 아이들도 허리를 잡고 껄껄 웃는다.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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