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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승종의 역설] 영조와 활

등록 2011-09-26 19:22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영조는 무과 시험과목에서 보사(步射)의 과녁을 80보에서 50보로 끌어당겼다. 사정거리가 멀면 화살 힘이 분산되기 때문이었다. 송나라 사람 서긍도 <고려도경>에서 고려인이 쏜 화살은 멀리 나가지만 힘이 없다고 평했다. 실학자 이덕무 역시 먼 과녁 맞히기만 좋아하는 것은 병폐라고 비판하였다.(<청장관전서>)

활에 관해 영조는 모르는 게 없었다. 한번은 무신 홍화보가 어명으로 활을 쏘게 되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단 한 발도 맞히지 못했다. 왕은 즉석에서 원인을 규명해냈다. “그대가 활을 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각궁이 너무 늘어져서 그렇다.” 왕은 이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활을 꺼내 단번에 표적을 꿰뚫었다. “나는 한 번 맞히면 족하다. 그대가 이 활을 받아 간직하거라.” 영조는 즉석에서 자신의 활을 홍화보에게 하사했다.(정약용의 <다산시문집>) 활솜씨도 대단했지만 활에 대한 영조의 지식 또한 해박하였다.

조선 식자층은 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익은 강궁의 원리를 파헤쳐, 화살이 길고 활이 강하면 화살이 부러진다고 분석했다. 그 문제는 기계를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한동안 이런 식으로 기계의 장점을 논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백성이 곤궁하여 굶주림과 추위를 헤어나지 못하면 싸움터를 달게 여길 리 없다. 기계란 하나의 보조수단일 뿐이다.”(<성호사설>)

“내 활은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영화 <최종병기 활>(감독 김한민)의 대사도 이익의 생각과 상통한다. 활에 정통했던 영조 때, 예언서 <정감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삶에 지친 백성들은 난세의 해답은 오직 “궁궁”(弓弓)에 있다고 했다. 오직 활과 활에 살길이 있다는 이 말의 실체를 놓고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음양이 미분화된 태극 곧 후천개벽에 대한 기대였다. 영조는 눈앞의 활에만 눈이 밝았던 것은 아닌가.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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