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금강석이 곧 다이아몬드다. 불교와 관계 깊은 보석이어서 <금강경>, 금강역사가 있다. 명산 중의 명산 금강산도 있다. 고려 때는 금강석으로 된 염주까지 있었다. 선종의 장인 이예가 쓴 <삼각산중수승가굴기>에 보면, 1099년 헌종은 삼각산을 찾아가 재를 올리고 이 보물 염주를 보시했다. 왕의 행차에는 왕비와 태자, 고위 승려 및 관료들도 동참했다. 국운을 연장하려면 남경(서울)을 중시하라는 술사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이 보석이 인기를 끌었다. 당 고조의 신하 부혁은 영양의 뿔로 금강석을 쪼갰다는 기록이 있다. 실학자 이익은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 생각했다. 금강석을 본 적조차 없었던 이익은, 고문헌에 기대어 그 모양을 석종유(石鍾乳)나 자석영과 같다고 짐작했고, 물 밑에서 발견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워낙 귀한 것이라 십중팔구 가짜라고 보았다. 부혁이 손댄 것도 맥이라는 동물의 치아일 것으로 확신했다. 그것은 두들겨도 깨지지 않고 불 속에 넣어도 타지 않기 때문에, 금강석이나 진신사리로 둔갑한다고 했다.(<성호사설>)
인도 사람들은 이미 3000년 전부터 다이아몬드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이 보석을 신성시했다. 그리고 불교는 그 전통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이 보석은 서쪽으로도 전해져 로마 사람들도 사랑했다. 훗날 서양인들은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다이아몬드 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였다. 쏟아져 나온 이 보물은 결혼예물이 되어 18세기 서양의 상류사회를 점령하였다. 일부는 중국으로도 흘러들어갔다. 1777년 사신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이갑은, 서양인들이 광둥지방을 통해 금강석 등의 귀금속을 조공으로 바친다고 기록하였다.(<연행기사>)
보물찾기에 나선 현 정부 인사들은 카메룬으로 달려가 수선을 피워댔다. 결국은 씨앤케이(CNK)의 주가조작 사태가 터졌다. 작년부터 말이 많았는데 실세가 힘으로 막았단다. 앞뒤 못 가리는 그놈의 돈봉투 인간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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