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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낮은 목소리] “회사가 지옥”…회 못먹자 회식을 매번 회로

등록 2012-02-02 20:31수정 2012-06-20 15:29

[낮은 목소리] 직장에서 ‘왕따’ 당하는 어른들
우울·공황장애…“내가 없어져야 고통이 끝날까요”

‘왕따’는 아이들 세계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한 취업포털의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2975명 가운데 45%가 “직장 내 왕따가 있다”고 답했다. 왕따 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답한 것은 전체의 61%에 달했다. 포털 지식검색 서비스에는 직장 내 왕따 문제로 고민을 토로하는 글이 수백 건 쌓여 있다. 현재 방영중인 한 지상파 드라마에서도 직장 내 왕따가 소재로 등장해 시청자들의 반향을 불러왔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크게 개인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으로 나뉜다. 주로 내성적이고 원칙을 중시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왕따를 당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개인의 문제보다는 조직의 특성상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메디웰병원 안주연 원장(정신과 전문의)은 “한국 사회는 노멀(정상)의 범주가 너무 좁다”며 “서구 기준에선 전혀 문제가 없는 성격임에도 한국 조직문화에선 왕따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안 원장은 “학생들과 달리 어른들 사이에서의 왕따는 노골적인 폭력보다 은근한 따돌림(속칭 ‘은따’)이 많으며, 이를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 정신적으로 더욱 극심한 고통 상태에 빠진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이번 ‘낮은 목소리’의 주제는 ‘직장인 왕따’다. 개인 사례를 그대로 보도할 경우 사생활 노출의 문제가 있어 취재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김희연이라는 30대 초반 여성 직장인을 가상으로 설정했다. 기사에 나오는 사례들은 실제 직장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회사 옥상에 서 있다. 뛰어내린다. 머리가 땅에 닿는다.

순간 잠에서 깼다. 또 악몽이다.

머리맡의 시계를 더듬더듬 찾았다. 새벽 3시. 두어시간 잤나 보다. 다시 눈을 감는다. 놀란 심장이 계속 쿵쿵 뛴다. 죽음의 공포가 찾아온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엄마가 관을 부여잡고 우는 모습을 상상한다. 심장 근육이 더 긴장한다. 오늘도 자기는 글렀다. 참, 내가 죽으면 그들은 슬퍼나 할까.

부엌으로 가 약봉지를 찾는다. 얼마 전 난생처음 정신과라는 곳을 찾아갔다. ‘우울증 초기와 경미한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신경안정제 반 알을 털어 넣는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심장이 잠잠해지는 듯싶더니 몸이 침대 속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울증·공황장애에 불면 연속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악몽
내가 죽어도 그들은 슬퍼할까
매일 아침 눈을 뜨기가 싫다

“따르릉~.”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뜨기 싫다. 매일 아침 눈을 뜨기 싫다. 이대로 계속 잠들었으면….

난 원래 아무 문제가 없는 직장인이었다. 내 일을 열심히, 그리고 깔끔히 마무리하고 개인생활을 즐기는 성격이다. 회식자리도 그렇게 즐기진 않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빠지지도 않았다. 술은 싫어하지만 폭탄주 한 잔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식성은 좀 까다로웠다. 생선이나 고기를 별로 안 좋아했다. 채식을 위주로 먹었다. “어머, 언니는 그런 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요. 그러니깐 살이 안 찌나 보다.” 이런 소리 많이 들었다. 주변에선 내가 예민하다고 말했다. 그래, 어느 정도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누구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다.

과장은 나랑 성격이 비슷했다. 내성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트러블도 별로 없었다. 상사가 그런 성격이라서 직원들도 별다른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공채 출신이 아니다. 원래는 중소기업에 다녔다. 그곳에서의 실적을 바탕으로 좀더 큰 직장으로 옮기게 됐다. 이곳은 공채 출신이 90%가 넘는다. 처음엔 걱정했지만 별다른 차별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게 안정적이었다. 일도 더 열심히 했다.

문제는 1년 전에 발생했다. 과장이 회사를 옮긴 것이다. 더 큰 기업에 스카우트됐다. 그때부터 사달이 벌어졌다. 새로 발령난 과장은 전 과장과 너무 달랐다. 말 그대로 ‘슈퍼우먼’이었다. 직원들을 쥐 잡듯 잡기 시작했다. 회식도 부쩍 늘었다. 일과 정치력 둘 다 요구했다. 과장은 부장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아부를 했다. 전 과장은 ‘마초’ 기질이 다분한 부장을 잘 컨트롤했다. 가끔 회식자리에서 수위를 넘나드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칼같이 끊기도 했다. 이번 과장은 달랐다. 먼저 노래방에서 블루스를 추자고 부장의 손을 잡았다. 부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다른 여직원들이 그런 상황에서 얼굴을 찌푸릴 수 없었다.

과장은 회식 다음날이면 숙취해소 음료를 부장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부장은 “센스 만점”이라며 허허 웃었다. 메신저로 과장을 흉보는 문자들이 랜선을 타고 직원들 컴퓨터 속을 오고 갔다. 난 당연히 과장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장은 아니었다.

직장상사 바뀌고 고통 시작
회 못 먹는데 회식은 매번 회…
남에게 피해는 안주고 살았다
내가 왜 이렇게 따돌림 당하나

어느 날 과장이 날 불렀다. “김희연씨는 너무 개인주의적인 거 같지 않아요? 여기도 조직 생활인데 너무 까탈스러운 거 같아.” 난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늘 그렇게 하듯 내 일 깔끔하게 마치고 칼퇴근을 했다.

내 회사 생활이 악몽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실적보고서였다. 새로 온 과장은 다른 회사로 간 전 과장의 잘못 때문에 실적 부진이 왔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난 거부했다.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 과장의 판단 착오가 책임이 더 컸다.

“그래요? 그럼 작성하지 마세요. 다른 직원 시킬 테니.”

싸늘한 말 한마디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 내가 회를 못 먹는다는 것을 안 과장은 회식 때 오로지 ‘회’만 고집했다. 그래놓고 항상 “아, 김희연씨 회 못 먹는다고 했나? 깜빡했네. 다음엔 딴 데로 가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회식 때는 또 회를 먹으러 갔다.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그나마 회식 일정을 알려주는 건 다행이었다. 당일 저녁에 회식이 있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은 다 알고 있었고 나만 몰랐던 회식이 꽤 된다. 중요한 공지사항도 고의로 누락시켰다.

보통 후배들이 처리하던 잡무들을 나에게 시키기 시작했다. 얼굴을 찌푸리면 “일하기 싫어요?”란 매몰찬 대답만이 돌아왔다.

더 이상한 건 다른 직원들도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전부 과장 편에 붙어 나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한번도 꺼내지 않던 ‘공채’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한번은 복도를 지나가는데 “쟤, 낙하산이야”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일을 더 열심히 했다.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도 생겼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해놓은 일에 잘못이 발견되면 지적하는 횟수도 많아졌다. 평소에는 그냥 넘어갈 일을, 내가 왕따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나도 모르게 지적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네보다 일은 잘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 멀어져 갔다. 후배들도 날 무시했다. 일을 시키면 “과장님 통해서 시키세요”라고 쏘아붙였다.

(안주연 원장은 “조직 내에는 여론을 주도하는 ‘키 퍼슨’(Key Person)이 존재하는데, 이 사람의 의지와 성향에 따라 다른 조직원이 ‘동조’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김씨가 겪은 상황의 경우 새로 부임한 과장의 성향에 따라 조직원들의 가치관이 바뀐 경우다.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남을 왕따시키는 것이다.)

실내화가 화장실 쓰레기통에…
변기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어른이 뭘 그런 걸로 고민하냐”
핀잔 들을까봐 하소연 못한다

이런 상태가 몇 달 지속되자, 회사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출근 자체가 겁이 났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학생이었으면 말할 선생님이라도 있지, 누구에게도 꺼낼 수 없는 문제였다. 꺼내기도 창피했다. “어른이 뭘 그런 걸로 고민하냐”는 핀잔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병원을 찾게 된 건 큰 사건이 있은 뒤다. 내겐 회사에 오면 구두를 벗고 편하게 신는 실내화가 있다.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실내화가 보이지 않았다. “누구 못 봤어요?”라고 물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난 그 실내화를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발견했다. 변기에 앉아서 한참을 엉엉 울었다.

곧 분노가 슬픔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왜 살지”라는 물음을 계속 던졌다. 매사에 무기력해졌다. 저녁에 침대에 누우면 그날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불면의 연속이었다. 안 먹던 술을 먹기도 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편해졌다.

치료를 받는 중이어서 많이 좋아지긴 했다. 하지만 지금도 내가 잘못을 하긴 한 건가,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처음엔 다 조직의 문제라며 모든 상황을 거부했다. 이것이 왜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느냐는 분노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나를 자책하게 됐다.

회사가 지옥 같다. 내가 없어지면 모든 게 끝날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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