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그는 변명조의 글을 많이 썼다. 나라가 금지한 천주교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도 신자가 아니었고, 박해를 당한 형제며 주변 인물들도 역시 아니었다고 항변하였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 때 매를 맞아 죽은 스승 권철신은 정말 억울하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권철신으로 말하면 성호 이익의 학통을 계승한 석학이었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그 고제(高弟)였다.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선생은 서교(천주교)를 믿지 않으셨다. 선생은 평생 주자를 사모하여 주자의 글을 외고 그 뜻을 글로 표현하기를 즐기셨다. 선생 자신만큼 주자를 깊이 사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정약용의 주장대로라면 권철신은 충실한 성리학자였다. 천주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1784년 권철신에게 보낸 안정복의 편지를 읽어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힌다. 안정복은 권철신의 대선배이자 인척이었다. 안정복은 절절한 어조로 천주교에 경도된 권철신을 타일렀다. “늙은이 잠꼬대로 취급해 물리치지 말고 싫어도 참고 들어주기 바라네. 요즘 또 듣건대 자네가 천주학에 빠져 경망스럽고 철없는 젊은이들의 앞잡이가 되었다지. 지금 세상에 사문(성리학)이 기대를 걸고, (중략) 후배들의 기둥이 될 사람이 자네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이렇게 갑자기 이단의 학문으로 떠나가 버리다니 도대체 왜 그런가.” 권철신은 안정복의 간절한 당부를 외면하고 말았다.
사실은 분명히 그러하였던 것이다. 하나 정약용은 아니라고 끝내 우겼다. 왜 그랬을까. 천주교 신자라는 먹물이 한번 몸에 튀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회생이 불가능한 폐족(廢族)이 되고 말 것이었다. 정약용의 거짓말도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속이 꽤나 불편하다. 어차피 망할 바에야 소신대로나 살았더라면 좋았을걸. 통합진보당 사태를 지켜보자니 속이 또 부글거린다. 그놈의 금배지가 뭐 그리 대단하냐.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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