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또 ‘대선 불복’이냐고 따진다. 지겹다. 기이한 것은 그 앞에서 잔뜩 움츠러드는 민주당이다. 김한길 대표는 엊그제 한국방송에서, ‘불복하는 것이냐’는 진행자의 물음에 ‘아니다’라고 서둘러 발뺌했다. 그저 “관권 개입이 없도록 제도적으로 분명하게 해놓자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설훈(“선거 결과 승복 여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세균(“선거 불복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의원 같은 이들이 있지만, 민주당은 ‘불복’이란 도깨비만 나오면 혼비백산한다.
‘불복’ 논란은 주술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의 역풍으로 옛 민주당과 한나라당(새누리당의 모체)이 참패했던 경험을 이용해, 야당을 겁박하는 허깨비다. 그러나 탄핵소추 사태와 국정원 사건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노 대통령은 당시 공개 석상에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옛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이것을 두고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 위반이라 하여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 자신의 선택이 정치권에 의해 부정당한 유권자들은 투표로써 이들을 심판했다. 이번 국정원 사건은 국가기관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위한 불법선거(흑색선전, 비방) 운동의 수족 노릇을 했고, 이를 통해 유권자의 주권 행사를 왜곡시켰다. 직접적인 피해자는 바로 유권자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 건가.
불복 문제도 사실 이를 판단할 주체는 유권자다. 국정원의 부정선거로 덕을 본 새누리당이 아니다. 그들이 지금 바라는 것은 엄정한 수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고, 사법부가 범죄의 경중을 정확하게 판단해주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해자 입장에서 불복 문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은 유권자를 침묵하는 양떼, 바보로 간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야당도 문제다. 다음 선거에서 역풍만을 우려해, 이처럼 중대한 공익(국민주권)의 침해 앞에서 주춤거린다면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
유권자의 가장 큰 관심은 국정원의 불법행위가 선거 무효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지금까지 특별수사팀이 밝힌 사실만으로도 무효 논란이 일 만하다. 이미 검찰은 국정원(장)을 기소했다. 최근엔 특별수사팀은 더 악질적인 트위터 공작을 찾아냈다. 인터넷 댓글 공작이 소총 발사라면 트위터 공작은 무차별 폭격에 해당한다. 여권도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실은 인정한다.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 윤상현 의원은 선거와 관련된 트위트질이 2234건이라고 콕 찍어 발표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 “그렇다면 제가 댓글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여야 대표와의 ‘국회 3자회담’에서). 그동안 ‘젊은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 사건’이라며 한사코 공작을 부인하던 그였다. 다만 이것이 선거의 당락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고 버틸 뿐이다.
덕을 톡톡히 본 쪽의 판단이라고 무시할 일은 아니다. 다만 반대의 판단도 존중해야 한다. 국정원 심리전단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여론 조작을 하고 유권자의 선택을 왜곡시킨 사실, 십알단 등 새누리당 선거 외곽조직과의 연계 속에서 활동했다는 의혹 등을 들어, 총체적인 선거 부정이요 따라서 선거 무효라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짜고짜 ‘불복’이란 부적을 들이댈 게 아니라, 엄정한 수사와 재판부의 판단을 기다리는 게 도리다.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사실상의 원고인 유권자들도 이를 원한다.
그럼에도 이 정권이 불복 논란을 거듭 제기하는 건 사건을 아예 무효화하고 싶은 의도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대선 때부터 지금까지 국정원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고, 물타기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경찰의 수사 왜곡과 축소 조작 발표, ‘엔엘엘’ 물타기, 검찰총장 찍어내기, 축소 수사 압력과 수사팀장 찍어내기 그리고 지금의 수사팀 감찰 등. 돌아보면 이 정권이 출범 후 한 일이라곤 대선 공약 폐기와 국정원 사건 은폐 조작이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유념할 게 있다. ‘불복’ 주장으로 당장 재미 보는 것 같지만 실은 재앙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선 부정을 은폐·조작하는 모든 짓들은 ‘대통령 탄핵’ 사항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 chank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