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윤석열 전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장의 국정감사 증언을 보면서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1992년에 벌어진 ‘안기부 흑색선전물 배포사건’이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총선을 앞두고 당시 야당이던 홍사덕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그때 나는 검찰 출입 기자였다.
수사가 시작되고 며칠 뒤 수사 검사 방에 갔다. 며칠 잠을 못 잔 듯 검사의 얼굴이 퀭했다. 많이 야위었고, 양손에 수포가 나 비닐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의 근본에 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언론이 왜 이렇게 관심을 안 갖죠?” 무슨 말인지 감이 왔다. 언론이 그 사건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있을까? 쓸 걸 못 찾아 못 쓰고 있는 거지. 그 검사도 알 거다. 그의 말은, 그만큼 수사가 힘들다는, 장애물이 많다는 얘기로 들렸다.
실제로 안기부 관계자에 대한 소환조사는 현장에서 붙잡힌 이들의 직속상관 한 명에 그쳤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첫 공판에서 구형을 했고, 피고인들은 2회 공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항소심을 앞두고 법원에 제출된 검찰 수사기록을 봤다. 추정은 하지만 입증하지 못한 단서들도 다 담겨 있었다. 그걸 보니 어디를 수사하려고 했는데 어디서 막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기부 여직원을 유인물을 쓴 용의자로 지목했는데, 당연히 뒤따라야 할 소환조사나 필적감정이 없었다. 안기부 직원 신분증을 밖에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행정과에서 따로 보관하는데 피고인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나왔다. 그럼에도 행정과 직원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검사는 이런 말도 했다. 그 당시 다른 여러 지역구에서도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들이 발견됐다. 내가 그 얘길 꺼냈을 때였다. “이건 분노해야 할 사건입니다.” 기록을 보면, 처음엔 신문에 응하던 피고인들이 안기부 쪽 변호사를 접견한 뒤부터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연히 안기부는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을 테고, 압수수색이나 구인영장을 발부받겠다고 하면 검찰 간부들이 말렸을 거다. 그래서 검사는 수사기록에라도 남겨놓았을 거다. 자신이 게으르거나 비겁하거나, 최소한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를. 그때 생각했다. ‘검사가 그런 거구나. 외압이든 내압이든 수사를 가로막는 건, 그의 명예와 인격을 짓밟는 일이 될 수 있구나.’
윤 전 팀장의 국감 증언 내용은 그때 사건과 많이 닮았다. 국정원 직원을 체포했더니 변호사를 통해 국정원장이 함구령을 지시했다고 하고, 국정원이 소환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영장을 받으려 하니까 검찰 간부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같은 상황에서 윤 전 팀장은 다른 선택을 했다. 자기 전결로 영장을 받아 체포했고, 국정원의 범죄사실을 추가해 공소장 변경신청을 했다. 앞에 말한 사건과 비교하는 건 무리일 거다. 그땐 노태우 정권 때였고, 그 검사는 평검사였다. 하지만 그때, 21년 전에 안기부의 선거 개입을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했다면 지금의 국정원 사건이 벌어졌을까. 최소한 이렇게 대대적으로 이뤄지진 못하지 않았을까.
윤 전 팀장에 대해 대검찰청이 감찰을 시작했다. 때마침 새 검찰총장 후보가 지명됐다. 강직한 면모로 검찰 안팎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적격이라는 판단이 지명의 이유라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감찰과 그 결과 발표를, 새 총장 취임 뒤로 미뤄야 한다. 윤 전 팀장에 대한 감찰은, 검찰을 신뢰할 수 있냐 없냐는 문제의 정점에 서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납득 못 할 감찰 결과를 내놓은 뒤에 새 총장이 취임하도록 하는, 그래서 그의 ‘강직한 면모’를 여론 물타기용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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