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서울 시내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인다. 기분 안 좋다. 전엔 이걸 보고 즐겁지 않은 나를 반성하려 했는데, 이젠 그런 시도도 안 한다. 안 좋은 건 안 좋은 거다. 종교적인 이유와 무관하다. 장식에 불과한 그 무생물이 이렇게 말하지 않나? ‘연말이 되니 행복하지? 아님 넌 잘못 산 거야.’ 그래. 잘못 살았다 치자. 하지만 속절없이 한 해가 또 가는 건 어쩔까. 그래. 어차피 가는 거 한 달 빨리 보낸다 치고 올해 나한테 가장 인상 깊은 뉴스가 뭐였더라. 개인적인 일 말고.
여전히 꼰대인 건가, 검찰 출입 기자를 오래 해서인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 그리고 사퇴, 윤석열 수사팀장의 공소장 변경 신청과 징계 회부…. 검찰에서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을 일단 ‘검찰 파동’이라고 불러보자. 지난 8월 말에 신문에서 이런 구절을 봤다. 대선 개입 혐의로 구속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첫 재판 기사였다.
… 검찰은 “원 전 원장이 ‘대북 심리전’을 구실로 정부·여당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종북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종북 딱지’를 붙이는 ‘신매카시즘 행태’를 보였다”고 말했다. … 검찰은 “민주적 의사 형성에 필수적인 자유로운 사이버 공간에서 국정원 직원이 일반 국민을 가장해 정치·선거 여론을 인위적으로 조장한 행위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반헌법적 행태다. 피고인의 그릇된 인식으로 소중한 안보 자원이 특정 정치세력에 이용돼 안보 역량이 저해됐다”고 지적했다. …
나는 전부터 매카시즘이라는 말이 힘없어 보였다. 남의 나라 얘기고, 매카시가 매카시즘 때문에 감옥에 간 것도 아니고 등등의 이유로 수사를 위한 수사처럼 들렸다. 실제로 한국에서 매카시처럼 말하는 이들에게 매카시즘이라고 말하면 기분 나빠 할까. 칭찬으로 듣지 않을까. 그런데 이 단어가 검사의 입에서 나오니 달랐다. 힘이 실리고 긴장감이 살아났다. 종북이라고 말하는 건 자유겠지만, 공인이 (‘무차별적으로 종북딱지를 붙이는’) ‘그릇된 인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거였다.
누군가 그 검사도 종북이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 검사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당연히 공소유지, 곧 피고인이 법을 위반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일 거다. 그리고 그 법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법인 거다. 놀란 건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지난 정권에서도, 지금 정권에서도 수세에 몰리면 전가의 보도처럼 나오는 말이 종북 아닌가. 그러니 ‘매카시즘’이라는 비난도 수없이 들었을 거다. 그런 정부도 검찰의 입으로 들으니 달랐던 모양이다. 얼마 뒤 ‘검찰 파동’이 터졌고, 아직도 진행중이다.
검찰 출입 기자를 할 때 신문사 선배에게서 ‘친검찰 편향’이라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나중에 보니 보수 언론, 진보 언론 할 것 없이 검찰 출입 기자는 회사 안에서 대개가 그런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검찰이 제대로 일하면 얼마나 멋진 성과를 내는지, 얼마나 큰 변화를 초래하는지, 그 가능성을 믿기 때문일 거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한국 검찰은 안 돼’라는 생각을 가끔 했는데, 올해 검찰은 내 안에 있던 ‘친검찰 편향’을 다시 살려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팀은 된서리를 맞았지만, 그래서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낳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를 놓고도 여당이 비난하고 야당이 칭찬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올해 10대 뉴스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별도로 ‘검찰 파동’이 꼽힐 거라고 본다. 그래야 한다. 국민에게 ‘좋은 국정원’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국정원이 나쁜 일을 했을 때 제대로 처벌할 수 있는 ‘좋은 검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