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
천생 전라도 촌놈(박승옥), 그러나 그가 몸을 움직이면 필시 바람이 되고 파도가 되어, 방파제를 타고 넘는 만파였다(홍성담). 아무리 급해도 급할 것 없고, 아무리 어려워도 어려울 게 없었으며, 아무리 난감해도 주저함이 없었고(이철), 살아서 한번 생명을 내줬으니 집착하고 욕심부릴 게 어디 있을까,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다(함세웅).
나병식. 20일 작고한 그에 대한 기억을, 오늘도 어느 길모퉁이에서 서성이는 젊은 벗들과 함께 나누려 하네.
… 1974년 11월13일치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1단짜리 단신.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중인 서울문리대생 나병식군의 어머니 김○○ 부인과 동생 영순 양, 병문 군이 11일 오전 7시반경 전남 광산군 자택에서 잠자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남매는 숨지고 어머니는 중태에 빠졌다.” 그리고 1975년 2월17일치 단신. “15일 밤 9시10분, 교도소 문을 나서는 나병식 군에겐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옥살이를 하는 동안 두 동생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숨졌던 것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서울대생이 되었지만, 그는 가족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의 아들이 되었다.
1974년 4월 비상보통군법회의는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라는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1975년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지만, 이후의 삶은 시대의 제단에 바쳐진 그야말로 여생이었다. 모두가 움츠러들었을 때 그는 일어섰고, 주저할 때 앞장섰다. 누이에게 하늘의 별을 따줄 만큼 큰 덩치로 뚜벅뚜벅 걸어갈 때면 그 곁에만 있어도 벗들은 안심했다. 표적은 늘 그였다. 그렇게 그는 제 마음속의 별(민주주의와 정의)을 바라보며 어둠을 뚫고 나갔다. 그 끔찍한 긴급조치 9호를 비웃는, 첫 시위(1975년 5·22 사건)로 다시 구속됐다. 1980년 신군부의 합수부는 그를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했고, 전두환 정권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로 수배했고, 수배중에도 <한국민중사>를 출간했다가 또다시 구속됐다….
고리타분한 훈계나 어설픈 교훈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라네. 사람은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 그 기억이 아름답고 향기롭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세상 누군들 다르겠는가. 그 단신으로 말미암아, 그는 내 마음의 작은 별이 되었지. 외롭고 두렵고 슬플 때면, 조용히 눈을 감고 헤아려보는 그런 별 말일세. 세상 누구에게나 그런 별은 있는 법. 잇따른 저 견고한 벽과 어둠 앞에서 서성이는 젊은 벗들도 마찬가질세. 별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니까.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기억조차 사라진 이성의 시대의 회복을 꿈꾸던 죄르지 루카치의 말은 오늘 우리에게처럼 절실한 적은 없다네. 왕조는 사라졌다지만, 제왕과 귀족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자본과 자본가, 사람은 그 종이 되어가고 있지. 그 횡포를 막아야 할 권력은 오히려 저항하는 이들을 억압하는 마름이 되었다네. 지금도 모두가 누려야 할 것들(의료, 교육, 물, 가스, 철도 등)을 남김없이 자본에 넘기려 하고, 거부하면 내쫓고 짓밟는 일이 진행되고 있지. 빵과 자유, 종과 인간 사이에서 방황하고, 그나마 배부른 종이 되기도 힘든 형편이니, 서성이는 그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 타계하기 전 그의 지인들은 노래 ‘부용산’을 한영애, 안치환, 이동원 등 여러 버전으로 들려줬다네. 말 못하던 그의 눈가에 이슬 맺힌 걸 보면, 먼저 간 누이에 대한 사무친 안타까움은 여전했던 것 같네. 누이 하나 못 지켜준 못난 오라비…. 그러나 지금쯤 아직도 열여덟 꽃다울 누이와 상봉했을지 어찌 알겠나. ‘오빠, 고생했어. 그런데 왜 이리 늙었다우?’ 그래서 국립 5·18 묘역에 안장되는 것도 마다하고, 굳이 가족 곁에 묻히려 했던 걸까.
오늘은 밤이 더욱 어둡기를 기다려 별을 찾아보려 하네. 찬연하게 빛날 오뉘의 별을 말일세. 어찌 알겠나. 그 빛에 내 안의 어둠 또한 씻겨 나갈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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