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시인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지 오늘로 11일째입니다. 성년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은 고등학생들을 생각하니 제가 너무 오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 세상에선 젊은 누리꾼들이 비아냥거립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한 애들은 죽고 늙은 사람들은 살아 나왔네.’ 나이 든 희생자도 있으니 틀린 말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 말에 담긴 적대감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들이 암시하듯, 나이는 이 사회의 부조리와 부실과 부패에 대한 적응능력을 나타내는 숫자일지 모릅니다.
‘요즘 애들’을 키운 게 어른들이니 세대 간의 반목을 지우는 것도 어른들 몫입니다. 젊은이는 늙은이가 오래전 걷던 길을 지금 걷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내가 겪던 고통, 내가 씨름하던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을 애틋한 사랑으로 감싸는 어른들이 바로 세대 간의 적대감을 지우는 지우개입니다. 침몰선에서 구조된 지 이틀 만에 저세상의 제자들을 따라간 단원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꼭 그런 분일 것 같습니다.
이십칠년 동안 도덕과 윤리를 가르쳐온 선생님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함께 젊은이들을 살리지 못한 무능한 어른의 부끄러움을 누구보다 깊이 느끼셨을 겁니다. 그러니 ‘이백명의 생사를 모르는 채 혼자 살기에는 벅차다’며 소나무에 목을 매셨겠지요. ‘저승에 가서 실종된 아이들의 선생 노릇을 할까’ 하는 유서를 읽다 보면 만나 뵌 적 없는 선생님의 젖은 눈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승이나 저승에서 다시 교단에 선다면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참아. 대학 가면 네 맘대로 살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죽음의 신에겐 눈이 없습니다. 젊어 죽는 사람보다 늙어 죽는 사람이 많지만 모든 젊은이가 죽음에서 자유로운 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 ‘해야 한다’는 일만 하다가 ‘하고 싶은 일’ 한번 해보지 못하고 미래가 오기 전에 죽는 젊은이가 한둘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결코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어른도 틀릴 때가 있고 선생도 틀릴 수 있다’며 ‘너 자신을 믿어라’고 하실 겁니다. 세월호 침몰에서 세계가 놀랄 만큼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무엇보다 학생들이 ‘그대로 있어라’는 승무원들의 지시를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는 얘기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이 낯선 배 안에서 선생님 같고 부모님 같은 승무원들의 지시에 순종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선생님은, 위기에서 믿을 건 너 자신뿐이고 몸이 강해야 정신도 강해진다며, 체육시간을 아껴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내치실 겁니다. 선생님은 또 진정한 ‘소통’은 ‘자립’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니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홀로 서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실 겁니다. 침몰 직전 세월호 승무원들과 지상 간에 이루어진 대화를 보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의 소통은 소음이며 낭비라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제 몫을 하는 세상엔 천재지변은 있어도 인재(人災)는 없다고 강조하실 겁니다.
오십이년의 삶을 싸들고 떠나며 선생님은 ‘어른들’에게 몸으로 유언했습니다. 젊은이들을 사랑하라고, 반목을 지우는 것도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요즘 애들’을 꾸짖던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아이들을 죽음에 밀어 넣은 어른들 중에서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가슴 치는 사람이 왜 하나도 없을까요? 자녀를 부검해 달라는 부모들의 깊은 슬픔을 헤아린다면, 어두운 물속에서 우리를 기다릴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김흥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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