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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토굴에서 만난 손학규

등록 2014-10-16 18:44수정 2014-10-17 11:03

정계 은퇴를 선언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전남 강진 다산초당 인근 백련사 뒷산 토담집(흙으로 지은 집)에 둥지를 틀었다. 7·30 재·보궐선거 패배를 뒤로하고 21년간의 정치인생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은 손 고문은 부인과 함께 이 토담집으로 내려와 칩거 중이다. 사진은 토담집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는 손 고문. 연합뉴스
정계 은퇴를 선언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전남 강진 다산초당 인근 백련사 뒷산 토담집(흙으로 지은 집)에 둥지를 틀었다. 7·30 재·보궐선거 패배를 뒤로하고 21년간의 정치인생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은 손 고문은 부인과 함께 이 토담집으로 내려와 칩거 중이다. 사진은 토담집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는 손 고문. 연합뉴스
[아침 햇발]
전남 강진의 백련사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지 않고 온화했다. 산길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추수 직전의 황금들녘과 그 너머로 구강 포구를 고즈넉이 품은 남해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절경이다. 서기 839년 무염선사가 이곳을 천년고찰 백련사의 터로 점찍은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남도 끝자락의 산속에 위치한 이 작은 말사가 요즘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난 7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이곳에 은둔하며 책을 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2주 전 주말엔 부산에서 온 지지자 수십명이 손 전 대표를 만나겠다며 산속 곳곳을 뒤지고 다니다 끝내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갔다고 사찰 관계자가 전했다. 그 며칠 뒤엔 한밤중에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백련사를 찾았지만 역시 손 전 대표를 만나지는 못했다.

백련사에서도 가파른 산길을 20분 정도 더 올라가면 나오는 흙집에 손 전 대표는 아내와 단둘이 산다. 스님들이 정진수행할 때 머물던 ‘토굴’(불가에선 스님의 수행처를 이렇게 낮춰 부른다)이라, 부엌도 없는 5평 남짓한 방 한 칸과 툇마루가 전부다. 점심은 백련사에 내려가 공양을 하고, 아침과 저녁은 고구마나 밤 등으로 때운다고 했다.

손 전 대표가 여길 은둔처로 잡은 이유를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매일 아내와 함께 다산초당까지 난 산길을 걷는다. 19세기 초 천주교를 받아들인 죄로 강진에 귀양 온 다산 정약용은 백련사를 오가며 큰스님 혜장선사와 교분을 나눴다. 그래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산길을 남도유배길이라 부른다. 매일 이 길을 걸으며 손 전 대표는 스스로를 유배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그의 얼굴이다. 온갖 상념에서 해방되어선지 10년은 더 젊어 보인다. 2007년 민주당이 대선에서 패한 뒤 2년간 춘천 부근 외딴집에 기거할 때 그의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였다. 이번엔 말끔하다. 왜 수염을 기르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4가지 규율을 지켰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몸을 단정히 하며, 말을 삼가고,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나도 그 가르침을 따르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정계은퇴라는 뜻밖의 선택을 한 이유를 물었다. “이번에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그런데 투표 1주일 전쯤, 선거에서 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질 수도 있을 거 같아. 지면 깨끗하게 은퇴하자’고 얘기했다. 21년 정치했는데, 더 미련 두면 뭐하나. 물러날 때 깨끗하게 물러나야지. 그래야 또다른 사람이 앞으로 나가지….”

그의 선택은 미국 민주당의 앨 고어 전 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플로리다 재검표 끝에 아깝게 조지 부시에게 패했던 앨 고어는, 2004년 선거에 다시 나서라는 지지자들의 요청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거에 다시 나설 투지와 포부를 갖고 있지만, 그렇게 하는 건 옳지 않다. 내가 부시 대통령과 다시 맞붙으면 선거 초점은 미래가 아닌 과거로 되돌려질 게 분명하다. 모든 선거캠페인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 고어는 조용히 뒤에서 민주당을 돕는 길을 택했다.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정치인의 얼굴에서 미래를 읽을 때, 유권자는 그를 지지한다. 정부여당이 아무리 못해도,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국민은 마음을 주지 않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야당(당시 한나라당)의 아성이던 재보궐선거가 왜 이제 와선 야당의 늪이 되어버린 걸까? 새정치민주연합을 이끌겠다는 이들은 지금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볼 일이다. ‘나는 야당의 미래인가, 아니면 과거인가.’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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