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한 인사의 얘기다.
“장관 시절 어느 병원에서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런데 대책이 이상했다. 그 환자를 격리 치료하되 이 사실을 다른 환자들에겐 알리지 않고 병원 운영도 정상적으로 하겠다는 거였다. ‘다른 환자들에겐 발병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괜히 불안감만 커지고 상황 통제가 되질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최소한 같은 병실을 쓴 환자들에겐 정확한 사정을 얘기해주라고 호통을 쳤다. 우리나라의 전염병 대응이 비밀주의와 병원 우선이란 걸 그때 알았다.”
그의 말에서 이번 메르스 대응 실패의 원인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병원 이름은 가리고 같은 병실을 쓴 환자에게도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식의 대응으로 이제까진 그럭저럭 넘어왔던 것이다. 그게 구멍이 뚫려 최악의 결과를 빚은 게 메르스 사태다. 이번엔 두 가지 ‘불운’이 더해졌다.
첫째는, 복지를 전공한 학자 출신 장관의 판단능력 부재다. 첫 환자 발생이야 그렇다 쳐도 그 이후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고비는 여러 번 있었다. 아마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도 이전 장관들과 비슷한 보고와 대책이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 식의 보고와 대책이 국민 안전에 부합하는지를 중심에 놓고 판단했다면 상황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둘째는, 삼성서울병원이 하필 메르스의 거점이 된 것이다. 삼성 계열 병원에서 환자가 발생하면서 병원 정보 공개는 더 힘들어졌다. ‘삼성이니까 다르겠지’라는 심리가 정부 내부에도 팽배했다. 이 기대를 거두는 데 1주일 넘게 걸렸다. 삼성이 정부보다 국민 생명과 안전에 더 관심을 기울일 거라는 허황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메르스 확산 범위가 2m를 넘지 못한다고 믿는 전문가와 달리, 바이러스가 그 수치를 넘어설 아주 작은 가능성에 주목하고 바이러스보다 수십배 수백배 빨리 번지는 국민 불안감을 잠재우는 데 관심을 쏟는 건 정치의 영역이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군과 경찰, 교통, 교육 등 사회의 모든 역량을 신속하게 동원하고 통제하는 게 정치적 역량이다. 바이러스 경로를 추적하는 건 전문가의 몫이지만,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지휘해서 승리하는 건 정치지도자의 몫이다. 현 정부는 메르스 사태에서 중요한 정책 판단과 결정을 너무 많이 포기해버렸다. 박원순 서울시장 지지율이 오른 건, 선택과 결정을 미루지 않고 스스로 감당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료경력이 전무한 정치인 출신의 론 클레인을 에볼라 대응기구 수장으로 임명한 건 시사적이다. 공화당에선 “바이러스 문외한에게 전쟁 지휘권을 맡겼다”고 비난했지만, 미 질병통제예방센터 의사들은 오히려 환영했다. 항공이나 물류 이동을 신속히 통제하고 여러 부처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엔 정치적 경험이 소중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론 클레인은 최근 <워싱턴 포스트> 칼럼에서 “다음엔 (에볼라보다) 훨씬 더 위험스런 전염병과 맞닥뜨릴지 모른다. 빠르게 대응하지 않으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에볼라의 제1의 교훈이다”라고 말했다.
메르스의 교훈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또다른, 훨씬 정치적인 교훈이 남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특히 이 정부에선 유능한 인사의 발탁이 매우 긴요하다는 사실이다. 과거엔 부처에서 중요한 걸 놓치면 청와대가 걸러내는 게이트키핑 구실을 했다. 지금 청와대에 그걸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니 유능한 사람을 일선에 앉히고 그 사람에게 충분한 권한을 줘야 한다. 과감한 권한 위임만이 대통령이 사는 길이다. 메르스의 교훈이 곧 떠날 문형표 장관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훨씬 중요한 이유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박찬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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