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다 44황지우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
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
았다. 그 문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사람
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만 보았다. 가련한지
고, 서울이여. 너희가 바라보는 동안 너희는
돌이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빚은 위성도시(衛
星都市)여, 바람으로 되리라. 너희가 보고만
있는 동안,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인까지!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 소리를 못 듣느냐?
아, 갔구나, 갔어. 석고로 된 너희 심장을 내
꺼내리라.
나에게 대들어라. 이 쇠사슬로 골통을 패주
리라.
왜 내가 너희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가
라, 잘 가라.
문이 닫히고 나는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로 갔다.
파란 유황불의 화환(花環) 속에서 나는 눈감
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이 없어지는 것을 나
는 경험했다. 부끄러움의
재 한 줌.
*<나는 너다>(풀빛, 1987; 문학과지성사, 2015)
1980년 5월, 황지우(본명 황재우, 당시 29살)는 서울에 있었다. 1952년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란 그는 1972년에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는데 이듬해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동하여 강제 입영됐다가 1976년에 복학한 터였다. 1980년 당시에는 조교로 근무하면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를 비교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었다. 그는 4형제(승우, 병우, 재우, 광우) 중 셋째였다. 그보다 14살이 많은 맏형 황승우는 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는데 독학으로 영어를 익혀 광주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던 아우 황광우는 지명수배 중이어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해 5월 어느 날 황지우는 광주로부터 이런 소식을 듣는다.
“나는 서울에서 큰형님과 마지막 통화를 하였다. 광주는 쑥밭이 되었고 지금도 금남로 상공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는 것, 광우와 나는 절대로 광주에 와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기적인 형제애를 큰형님 자신부터 배신했다.” 큰형 자신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5월 광주항쟁 현장에서 광주시민들이 취재 나온 외신기자들에게 통역해줄 이를 찾았다. 나는 용기를 내 통역에 나섰다. 통역 도중 나는 시민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지금 상무관 안에 시신들이 놓여 있다고 합니다. 나와 외신기자들을 상무관으로 안내해 주세요. 이들에게 계엄군의 만행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가 번역해준 내용이 <뉴스위크>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국내에서 광주는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서울의 황지우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으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5월 30일, 그는 ‘땅아 통곡하라’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가방에 담고 집을 나섰다. 정장을 하고 안개꽃 다발까지 든 것은 위장을 위해서였다. “나는 유인물을 만들어 종로에 뿌렸고 청량리 지하철에서 체포되어 합수부에 끌려갔다.” 그가 유인물을 뿌린 곳은 종로 단성사 극장 앞이었는데 체포된 장소는 지하철 청량리역이었으니 그는 아마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20분 만에 붙잡혔을 것이다. 계엄합동수사본부가 지휘하는 밀실에서 황지우는 그해 여름을 보내게 된다.
“단성사 극장 앞에 나가 유인물 몇 장 뿌린, 이 초라한 사건은 김대중 내란 음모와 관련된 도심지 폭동 사건으로 위조되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고문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을 저주하였고 친구를 무고(誣告)하는 허위자백을 하고 만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친구는 그가 보는 앞에서 같은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의 코와 입으로 꿀꺽꿀꺽 들어가는 물과 함께 돼지 목따는 것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가 나에게 퍼붓는 욕·저주를 들었을 때 나는 내 영혼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고 내 내부가 파열되었습니다.” 그는 그해 초겨울에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그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세상에 나온다.
이 이야기를 나는 20~30대 독자들을 위해 적었다. 1980~9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이라면 황지우 시인을 아는 이가 많을 것이고, 또 황지우 시인을 안다면 이 사건을 아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이것까지 안다면, 그해 5월 이후 출가한 그의 큰형이 훗날 ‘영어 잘하는 스님’으로 화제를 모은 황혜당 스님이라는 사실과 노동운동가로 한 시대를 살아낸 아우 황광우가 지금은 인문학 저술가로 활동 중이라는 것까지 알지도 모르겠다.) 청량리에서 체포되던 당시의 일을 그는 몇 년 후에 시로 썼다. ‘44’라는 숫자가 제목을 대신하는 그 시는 세 번째 시집 <나는 너다>(1987)에 수록된다. 다시 5월이 와서 나는 이 시를 또 읽는다.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 플랫폼에 내리면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가는 그 길이 그에게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로 보였다. 체포되어서 끌려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는 저항하며 외쳤다.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인까지!” 지하철 소음 때문에 앞부분이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한 글자씩 지워지면서 더 절묘해졌다. “민주주의”에서 “민”이 빠지면서 이 나라의 주인이 ‘민’이 아니게 된 상황을 탄식하는 말이 됐고, “싸웁시다”에서 “싸”가 빠져 “웁시다”가 되면서 이 비극을 함께 울어달라고 호소하는 말이 되었다.
그때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는 서울 시민들은 소리치며 끌려가는 한 남자를 보면서 무엇을 했을까.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보기만, 했다. 그때 그를 스쳐간 생각은 이것이다. “가련한지고, 서울이여.” 끌려가는 사람이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을 가련히 여기다니. 시인에게는 저 무지해서 무정한 사람들이 돌덩어리처럼 보였다. 저렇게 돌이 되어가면서 세상은 멸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끌려가는 것은 자신이지만 죽어가는 것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때 그의 심정은 곧 멸망할 소돔을 떠나는 롯의 그것과 비슷했을까? 홀로 세계의 멸망을 예고했으나 열 명의 의인(義人)은커녕 한 사람도 그의 외침에 응하지 않았으니?
아니다. 소돔의 롯은 언덕 위에서 구원받았으나 서울의 황지우는 지하에서 고문받을 것이었으므로.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지하철 출입구 밖으로 끌려나온다. 지옥 안으로 들어온 것이니 지옥의 문이 뒤에서 닫힌다.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파란 유황불의 화환(花環)”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고 적었다. 그러나 문학은 기적적이다. 그가 등단 이후 쏟아낸 놀라운 시들은 바로 그 잿더미에서 솟아오른 것들이므로. 그의 시들은, 광주와 서울 사이에 있어야 할, 그러나 끊어져버린 어떤 선을 연결하는 일에 집요하게 바쳐졌다. 그러므로 이 시가 “부끄러움”으로 끝난 것을 시인 자신은 납득할지라도 한국시사는 납득하지 못한다.
20년 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떤 비극적인 것에의 감전이었다. 비극의 주인공은 하마르티아(hamartia, 실수 혹은 결함) 때문에 불행해진다. 황지우의 경우, 이 세계가 병들어 앓을 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정(性情)도 그의 하마르티아이겠지만, 그런 자신에게서 기어이 어떤 비겁의 자취를 적발해내는 결벽(潔癖) 또한 그의 하마르티아일 것이다. 그의 하마르티아가 그를 불행하게 했는지 어땠는지를 판정할 사람은 본인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들 때문에 그의 시가 특유의 뜨거운 긴장을 배타적으로 독점해왔음을 증언해줄 사람은 나를 포함해 수없이 많다.
*직접 인용된 회고와 증언은 황혜당, <스님!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십니까?>와 황지우, ‘뜨거운 모더니티’에서 발췌한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