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를 계기로 발생한 이라크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을 미군이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가두고 학대와 고문을 자행한 사실이 폭로된 것은 10여년 전 일이다. 그때 세계인에게 감춰져 있던 미국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났다. 일부 국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침략도 서슴지 않던 미국 자신이 잔인한 인권 유린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포로들을 학대하고 고문할 때 미군이 사용한 ‘선진’ 심문기법을 수립한 것은 중앙정보국의 심리학자들이었다.
지난해 말 존 켈리 미국 남부군 사령관은 미군 소속 심리학자들이 관타나모 수용소 억류자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선진’ 심문기법 운영에 심리학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은 것은 미국심리학회가 윤리강령 내용을 개정한 데 따른 조처라고 한다. 미국심리학회는 그동안 소속 회원이 고문이 포함된 군내 심문 과정에 참여해도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취해왔으나, 학회 내부와 외부에서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어 입장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가디언>에서 읽은 한 기고문에 따르면, 같은 군대 안에 있어도 심리학자들과 정신의학자들은 서로 다른 행동 규범을 따른다고 한다. 정신의학자들은 심리학자들과는 달리 포로를 학대하고 고문하는 과정에는 일절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고문의 필자는 그 이유를 정신의학자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해야 한다는 데서 찾았다. 알다시피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학문 영역에 속해 있고, 소속 학회가 어떤 윤리강령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개인 연구자들이 크게 다르게 처신할 수도 있음을 시사해준다.
서울대 수의대 조아무개 교수가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최대 가해업체인 옥시레킷벤키저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진행한 실험 결과를 그 회사에 유리하게 조작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은 충격이요 실망이었다.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나, 그런 혐의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연구자로서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가 논문을 조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개인의 일탈로만 여길 수는 없다고 믿는다. 서울대 수의대에서는 황우석 교수 사건, 강수경 교수 사건 등 논문 조작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이번에도 같은 대학에서 논문 조작 의혹이 제기된 것을 보면 그쪽 학문 수행 방식이나 연구 관행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미국심리학회는 늦게나마 윤리강령 내용을 바꿔 회원들이 포로 학대와 고문에 참여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해 남부군 사령관으로 하여금 관타나모 수용소 운영을 새롭게 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개별 학회가 각기 적합한 윤리강령을 채택하고 회원에게 그 내용을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럴 경우 각 학문 영역의 윤리의식과 책임의식이 강화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우려가 사라지진 않는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고위 공직 내정자들이 논문 표절을 한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그냥 임명되는 것이 예사가 되었다. 해당 학회에서 논문 표절임을 확인해도 임명권을 쥔 대통령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이런 관행이 횡행하면 연구 윤리의식이 더 나아질 리가 없다. 그뿐 아니다. 연구자에 대한 평가도 지나치게 업적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발표 논문 편수와 연구비 수주 액수를 기준으로 교수와 연구자를 평가하는 것이다.
한국의 학계가 논문 조작 같은 부끄러운 관행을 근절하려면 개별 학회가 적합한 윤리강령을 정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연구자로 하여금 논문 생산과 연구비 수주에 목매달게 하는 대학 경쟁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만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대학정책을 시급하게 극복해야 한다.
강내희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
강내희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