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방패 때문에 아르킬로코스 (기원전 680~640 추정)
방패 때문에 사이아(Saia)의 누군가는 우쭐하겠지.
덤불 옆에 나는, 원하진 않았지만, 흠 잡을 데 없는 나의 무장(武裝)을 버렸네.
그러나 내 몸을 구했네. 왜 내가 그 방패를 염려하랴?
가져가라지. 그에 못지않은 것을 나는 다시 가지리라.
16. 가장 아름다운 것 사포 (기원전 630~570 추정)
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어떤 이들은 보병대가
또 어떤 이들은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이라 말하겠어요. (후략)
* 헤르만 프렝켈,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김남우·홍사현 옮김, 아카넷, 2011)의 번역을 따랐다. 숫자는 두 시인의 유고(조각글)에 붙여진 일련번호다. 원래는 없는 제목을 임의로 달았다. 두 시인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앞의 책과 김헌의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살림, 2004)을 참조.
“애국심은 사악한 자들이 내세우는 미덕이다.”(Patriotism is a virtue of the vicious)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고 널리 인용되는 문장이다. 최근에 출간된 <오스카리아나―오스카 와일드의 찬란한 문장들>(박명숙 엮고 옮김, 민음사)의 469쪽에도 이 문장이 적혀 있다. 그가 했을 법한 말이기는 한데 (해외 네티즌을 포함한) 누구도 출처를 모르는 것 같아 의아했다. 그 대신 “애국심은 국민의 악덕이다.”(Patriotism is the vice of nations)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문장이 옥스퍼드대 잡지 <카멜레온>(1894년 12월호)에 실려 있다는 게 위키인용집(Wikiquote)의 설명인데, 해당 호에 오스카 와일드의 기고가 게재돼 있기는 하되 그 글에는 둘 중 어떤 문장도 없다.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누가 쓴 것이건 숱하게 되풀이 인용돼 왔다는 것은 저 말이 애국심의 강요를 억압으로 느끼는 이들에게는 통쾌한 진실로 느껴졌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망발로 느껴질 만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대통령에게도 그럴 것이다. 대통령은 2014년 12월29일에도 영화 <국제시장>을 인용하며 “국민들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할 때 나라가 발전”한다고 강조했고,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를 질타했다. 애국심은 선량한 국민의 미덕이라고 믿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모르겠다. 국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국가의 구성 요소는 주권, 영토 그리고 국민인데, 그렇다면 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구성원들을 사랑한다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이 나라 국민 전체를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대통령’이란 모든 국민을 공평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가능한 일이었다면 세월호 사건 유족들이 진실을 밝히려다가 대통령의 무관심과 정부의 방해 때문에 결국 또 단식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애국이 그런 것이라면,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이미 각자의 애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애국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도 할 수 없는 ‘모든 국민 사랑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일이 아닌가. 더 분명히 말하면,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애국이란, 그들이 사랑하지도 않는 국민에게까지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할 생각이 없지만 당신들은 우리를 포함한 국민 모두를 사랑해야 해’라고 말하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부당한 요구다.
우리 대통령의 연설은 자주 위협과 훈계와 회유의 화법을 취하는데 이것은 대통령의 성별과 무관하게 전형적인 가부장의 화술이다. 그런데 그 가부장이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가족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자주 느낀다. 대통령은 적의 도발에 대비해 국민을 지키기 위한 결단을 말하지만, 진짜 부모라면 ‘적의 도발’이라는 가정 자체를 거부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가족과 함께 용감히 싸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애초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릎이라도 꿇겠다는 마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연히 맞서길 부르짖는 이들은 불가피한 희생을 전제한다. 자신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희생 말이다.
그리스의 옛 서정시에서 시대를 초월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가짜 부모들의 명령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개인의 목소리가 거기에 있어서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등의 서사시의 시대가 서정시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집단’과 ‘전쟁’과 ‘애국’과 ‘명예’ 등등의 가치에 균열을 가져온 것은 서정시인들의 ‘나’의 목숨과 사랑에 대한 단호한 애착이다. 그 맨 앞자리에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라는 문장으로도 유명한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가 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는 여성의 것인데 그녀의 이름은 사포(Sappho)다.
헤르만 프렝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1951)에 따르면, 아르킬로코스는 전투로 생계를 유지한 직업적 전사였다. 그가 사이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위기에 처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의 구호 중 하나는 ‘방패를 들고, 아니면 방패에 실려!’였는데, 적에게 방패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 방패에 실려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방패를 버리고 목숨을 택했다. 내면화돼 있는 타자의 목소리를 따랐다면 목숨을 끊었을 것이나 그 순간 그가 따른 것은 자기 자신의 명령이었다. 헤르만 프렝켈이 “무의미해 보이는 순교적 희생”을 거부하는 “난폭할 정도의 솔직함”이라고 부른 것이 다음 다섯 글자에 짜릿하게 응축돼 있다. “가져가라지.”
사포는 오늘날 레즈비어니즘의 상징 중 하나다. 그녀가 당시 여성들의 ‘동아리’(Thiasoi)에서 멘토이자 연인으로서 소녀들을 사랑했다는 것과 그래서 그곳 ‘레스보스’ 섬이 오늘날 ‘레즈비언’의 어원이 됐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위에서 인용한 것은 아낙토리아라는 소녀를 그리워하며 쓰인 5연 분량 시의 첫 연이다. 전쟁 영웅을 숭상하고 무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녀는 그 모든 것들보다 한 소녀를 택한다. 아름다운 것을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이 시의 전언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가치의 입법자여야 한다는 시인의 선언이기도 하다.
이런 개인들의 목소리를 옹호하는 일은 공동체의 운명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개인이 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다만 권세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애국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하라는 말이어서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