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의 황제 월리스 스티븐스(1879~1955)
큰 시가 마는 사람을 불러
근육질인 사람으로, 그리고 휘젓게 해
부엌의 컵 속 색정적인 응유(凝乳)를 말이야.
처자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꾸물거리게 내버려 둬, 소년들에게는
꽃을 지난 달 신문에 말아서 가져오라고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유리 손잡이가 세 개 빠진
전나무 경대에서 꺼내, 그 시트 말이야
한때 그녀가 공작비둘기 수놓았던 그것을 펼쳐서
그녀의 얼굴을 덮도록 해.
딱딱한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싸늘하고 또 묵묵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램프의 빛줄기를 잘 고정시켜 놓도록.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 시집 <하모니엄>(Harmonium, 1923)에 수록
* 이 시의 한국어 역본으로는 영문학자 손혜숙과 시인 최정례의 것, 그리고 인터넷 여러 곳에서 공유되고 있으나 역자를 확인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번역, 이렇게 세 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선 번역들의 장점을 취하면서 만든 또 다른 버전을 여기에 보탠다.
지난 2주 동안 아이스크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 ‘아이스크림의 황제’를 처음 읽었을 때 경험한 그 선뜩했던 충격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이제 한 번 해명해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우연히 읽은 이 시에 끌렸던 것일 뿐 지금도 내가 월리스 스티븐스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닌데, 동시대에 활동한 R. 프로스트가 한국에서 누리는 명성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W. 스티븐스는 너무 덜 소개됐다. 우리 영문학자들의 연구 성과도 미국 시사에서 이 시인이 차지하는 지위에 비하면 그 양이 적고 그의 시선집 하나 나와 있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어렵기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이 시만큼은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1연부터 어리둥절하기는 하다. 왜 “시가(여송연)”이고 “아이스크림”이며 “근육질”인가? ‘주석’이 필요한 대목에서 ‘해석’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전문가가 알려주는 ‘사실’이다. “이 시는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서 치러진 가난한 여성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다. 키웨스트는 더운 지역이라 장례식 때 아이스크림을 대접했고, 1920년대는 냉장고가 나오기 전이어서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어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이 관례였다. (…) 키웨스트는 여송연 생산지로 유명하며 지금도 최고의 여송연은 사람이 직접 손으로 말아 만든다. 아이스크림을 휘저어 만드는 일은 상당한 힘을 요구해서 근육질의 남자가 맡아 하곤 했다.”(손혜숙)
위 주석 그대로 1연은 아이스크림 만드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모든 구절이 그 작업을 총괄 지시하는 사람의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시가를 마는 근육질의 남자를 불러서 응유(curds, 응고된 우유)를 젓게 하라.’ 시인은 응유에 생경하게도 “색정적인”(concupiscent)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서 이 제조 공정이 분만하는 에로틱한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게 했다. 프로이트라면 이 응유를 삶-충동(에로스)이 물질화된 것이라 했을지도 모르겠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니까 여자들은 쉬어도 좋다는 것과 재빠른 소년들은 행사에 필요한 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뒤를 잇는다. 문제는 그다음 두 구절이다.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Let be be finale of seem) 숱한 해석을 낳은 구절이다. B가 A의 피날레가 된다는 것은 A가 결국 B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모든 “보이는 것”(seem)은 결국 “있는 것”(be)으로 남게 된다는 것. 어떤 ‘있는’ 것이 다양하게 자신을 꾸미고 바꾸어 특정한 방식으로 ‘보이게’ 하며 만들어가는 것이 일생이다. 한 생애를 통해 다양하게 존재했던 ‘보임’이 아주 단순하고 투명한 ‘있음’으로 축소되는 순간이란 언제인가. 바로 장례식이 그렇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1차적으로는 (2연에 시신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장례식을 차질 없이 준비하라는 뜻이면서, 더 깊게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저 “피날레”의 준엄함을 잊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이어 이 명령을 선언적으로 재확인하는 매력적인 구절이 나온다.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모든 아름다운 ‘보임’은 결국 단순한 ‘있음’이 된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행사가 장례식이라면, 장례식에서 나눠 먹는 아이스크림이야말로 그 진실의 절묘한 표상이 될 것이다. 앞서 아이스크림을 달콤한 삶의 미각적 표상으로 끌어올린 이 시는 이제 아이스크림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녹아 없어진다는 것임을 상기하라고 암묵적으로 요청한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녹는다.’ 만약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진실이라면, 우리를 통치하는 ‘유일한’ 황제는 바로 아이스크림의 황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석을 통해 1연이 장례식 준비 장면임을 미리 알고 시작했지만, 사전 정보 없이 1연에서 2연으로 넘어가는 독자는 아찔한 점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건강한 젊은이들과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세계에서, 왜 갑자기, 얼굴에는 시트가 덮여 있고 딱딱한 발이 시트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시신의 세계로 건너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 이동과 더불어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부엌과 방 사이의 거리만큼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2연을 읽고 나면 다시 1연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의 1연은 처음 읽을 때와는 달라진다. 이제 아이스크림을 만든다는 것은, 즉 산다는 것은, 언젠가 녹아내릴 유한한 달콤함을 누리는 일이 된다.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해리의 꿈’(<해가 저문 이후>에 수록)에 대해 말하자면 스티븐스의 이 시를 슬쩍 언급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 소설 자체가 저 시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 읽힌다. 세 딸을 모두 키워내고 노년기로의 진입을 앞둔 부부가 있다. 권태로운 일상에 진저리를 치는 아내에게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악몽을 꿨노라고 말한다. 남편이 주저하자 아내는 재촉한다. 꿈은 말해버려야 실현되지 않는다고. 그런데 남편이 꿈속에서 봤다는 일들이란 게 그가 자는 사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어서 아내는 섬뜩함을 느낀다. 꿈의 참혹한 결말은 딸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절규하며 깨어났다는 것인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리면서 소설은 끝난다.
실제로도 딸은 죽었으리라. 일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전화 한 통으로 무너질 줄 알았다면 결코 권태롭다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어리석은 우리가 자기 앞에 놓인 것이 아이스크림임을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것, 혹은 그것이 영원히 녹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특유의 노련한 테크닉으로 경고한다. 그런데 허무주의와 쾌락주의가 가끔 등을 맞댄다는 말은 이 경우에도 맞는 것 같다. 예컨대 폴 마리아니가 최근에 출간한 스티븐스 평전(2016)은 ‘아이스크림의 황제’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유일한 것은 순간 그 자체”이며 “우리가 숭배할 만한 유일한 것은 쾌락”이라는 논평을 붙여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결론이어도 좋을까?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가 스티븐스 연구서 <그저 존재하는 것들>(Things Merely Are, 2005)에서 한 말은 쾌락주의의 취지와 같은가 다른가. “이 세상은 신들과 괴물과 영웅의 세계가 아니고, 날개 달린 영혼이 고요한 에테르 속으로 비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가까운 것, 낮은 것, 평범한 것, 불완전한 것들의 세계다. 이 불완전함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천국이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천국을 발견해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생에 관한 한 정직한 허무주의자가 되면서도 수동적 쾌락주의자가 되지 않는 길이 이 어디쯤에 있을까. 아이스크림의 황제,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글이 끝나기 전까지 답을 찾아내길 원했으나 오늘의 아이스크림은 벌써 다 녹아버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