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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음악의 수묵화

등록 2016-09-23 19:26수정 2016-09-23 20:06

[토요판]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
허공과 말라르메와 존 케이지
허공  작사 정욱 작곡 정풍송 노래 조용필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
스쳐버린 그날들 잊어야 할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잊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미련이 남아
돌아선 마음 달래보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설레이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
스쳐버린 그 약속 잊어야 할 그 약속
허공 속에 묻힐 그 약속

*1985년에 발매된 조용필 8집 수록곡인 ‘허공’ 속 조용필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다. 가왕은 절정의 부분을 노래하고, 자신이 노래한 바로 그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언뜻, 잠깐이다. 새벽잠의 호수는 빠끔,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얼음져 있다. 언 귀가 얼얼하다. 그때 갑자기 멜로디는 찾아온다. 머뭇, 멜로디가 생성되는 그 해구는 매우 깊다. 그 안을 언뜻, 머뭇, 바라보면, 어지럽다. 너무 깊고, 너무 우주다. 언뜻. 뜻이 얼어 있다. 영하 55도의 체감온도 상태에서 물티슈는 고체다. 언뜻, 그런 변화들. 그때 열리는 허공. 압도적인 허공의 개방성, 우연, 자유, 말라르메와 ‘욍 쿠 드 데’(un coup de d?s, 주사위 던지기), 한 번 던지기, 빈 종이의 불안. 완벽한 표현은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뜻의 드나듦을 제한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뜻이 드나들게 하여 무력화시킨다. 뜻만으로는 부족하다. 허공은 노래한다. 매달리지 말라고, 침묵하라고, 그냥 줘버리라고.

눈길이 구름 끝에 가닿는다. 움직이며 흩어진다. 자, 이 ‘흩어지는 움직임’을, ‘허공’을 어떻게 표현할까. 허공 속에 대상을 넣는 일 말고, 그냥 허공 그 자체를 그려내는 일. 사람들은 허공 속에 머문 몸을 그리지만 실은 허공이 몸을 지니고 있다. 허공이라는 몸. 가시적인 미디어로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허공의 육체성. 소리가 그 몸을 만진다. 소리는 허공의 날갯짓이다. 공중부양한 주사위의 자유. 여유, 덧없음. 운명의 자유. 결정되지 않은 모든 것들의 가벼움. 노래. 노래의 목숨. 뭔지 알겠는데, 잠깐 머뭇거리자. 머뭇머뭇머뭇머뭇…. 잽싸게 개념화시키지 말고, 놔둬 보자. 듣자. 들어보자고. 제발. 좀. 듣자. 눈을 치우듯 개념을 비질하면 드러나는 얼어버린 발자국을 따라가봐야지. 여백을 마련해 그 사이로 소리들이 들어오게 해야지. 알겠는데, 눈을 감고 모른 체하는 게 우선이다. 그 동면 비슷한 외면을 통해 ‘무심함’이 김처럼 서리고, 글씨는 거기다 쓰는 거다. 창문에 서린 김 위에 낙서하듯. 글은 그런 것이다. 글을 믿지 마라. 마음과 머리 사이에 존재하는 0.01초의 간극, 관상동맥 어딘가에 살짝 끼워져 있는 비늘의 통로를 통해, 그 비늘이 암시하는 시간으로 내려가 보자. 어류인 인류. 어류로 환생해보자구. 물고기의 노래를 들어보자구. 물고기는 귀에 더해 측선이라는 또 다른 귀를 가지고 있다. 어류는 액체 속에서 살고 사람은 기체 속에서 산다. 인류는 귀로 듣고 어류는 몸으로 듣는다. 사람은 공기의 진동을 느끼고 물고기는 물의 스침을 느낀다. 물고기의 몸-귀가 진화-분화해서 지금 우리의 동그란 귀가 되었다. 귀 속에 북이 있다. 따라 내려가면, 세월을 거슬러 아주 멀리, 수억년을 따라 내려가면, 귀 속의 북은 나의 피부에 드러나 있었다. 몸이 북이었고 몸이 귀였다. 거기까지 내려가 보자. ‘듣기’라는 행위는 사람을 늘 그 시절까지 끌고 내려간다. 고체상태의 물티슈를 다시 사용하려면 언뜻, 기다려야 한다. 깊이 내려가면 따뜻해진다. 거기까지 내려가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듣자. 듣는다.

허공은 가왕 조용필이 불렀고 ‘4분 33초’라는 공백은 존 케이지가 마련했다. 케이지는 말라르메의 자식. 그가 서양음악의 질문 형식을 바꿔놓았다. 50년 전쯤의 일이다. 그는 ‘너 4분 33초라는 음악 들어봤어?’라는 질문을 무력화시킨다.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너 들었니?’라는 질문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진다. 대신 새로운 질문이 솟아오른다.

‘너 거기 있었니?’

너 거기 있었니? 그래. 존재증명에서 현존의 알리바이로. 겨우, 알리바이로. 원래의 음악 상태로 돌아간다. 물고기가 듣던 음악은 그것이었다. 존 케이지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 마침표는 그들의 마침표. 말라르메가 백지를 노래하는 절대적 우연의 세계를 열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백지. 우리에겐 예전부터 그런 경지가 있었다. 예술은 당신의 현존을 건드리는 무엇이어 왔다. 우리에게는 말이다. 음악은 현존의 알리바이다. 더 정확히 말할까? 음안은 허공의 수묵화, 허공의 알리바이다.

허공의 장본인 조용필의 목소리에는 피가 묻어 있다. 성대에 각인된 상처, 상처의 반복. 가왕의 성대 속으로 들어가 본다. 가시가 돋쳐 있다. 숨소리가 가시덤불을 빠져나오며 깨진 거울 조각들로 변환된다. 성대에 아가미 상태의 결이 나 있다. 어류로 거슬러 올라가 있다. 그 상태로 공기를 조절한다. 목소리는 고래의 등에서 용솟음치는 소금물 같은 피를 뿌리며,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그렇게 절정의 부분을 노래하고, 자신이 노래한 바로 그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간주로 넘어간다. 그 사이에 가왕은 고개를 숙인 채, 누가 볼까봐, 겸손하고 신중한 동작으로 피를 슥 닦는다. 나는 왠지 스무살 때 읽었던 폴 발레리의 그 소네트의 마지막 구절로 달려간다.

Perdu ce vin, ivres les ondes!
J'ai vu bondir dans l'air amer
Les figures les plus profondes…

포도주는 사라지고, 물결은 취해 일렁인다!
나는 보았네 씁쓸한 허공 속에서
가장 심오한 형상들이 파도처럼 뛰노는 것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머뭇, 꿈이다. 오래전 하던 밴드에서 드럼 치던 멤버를 꿈에 봤다. 웃고 있었다. 씁쓸히. 사랑의 시간이 미움의 늪으로 변하는 것을 함께 목격했다. 견디기는 힘들었다. 바닥을 치는 순간에 부력은 찾아온다. 그때 공기를 폐에 넣으면 떠오르기 시작한다. 따뜻한 포옹은 꿈의 뒤뜰에. 신비로운 아침노을은 어린 시절의 시원한 마루에. 언뜻, 눈을 뜨니 허공에 떠다니는 피의 안개. 아침노을. 반지처럼 영원한 약속이 있었다. 이가 나간 그릇이 아무것도 담지 않고 그저 담담히, 있다. 놓여 있다. 침묵 속에서, 허공을 담고 앉아 있다. 깨진 그릇은 버려진 약속을 지키고 있다.

성기완 시인
성기완 시인
시간이 이처럼 고조되었다가, 잦아들었다가, 언뜻, 자유롭게 흐를 때, 소리는 있어야 하는, 와야 하는 것들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이탈하여 외침과 떨림의 덩어리로 눈덩이처럼 굴러가다가, 바람처럼 흐르다가, 다시 있어야 하는, 와야 하는 것들 사이로, 마치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다시 이정표로 돌아오듯, 그렇게 흐른다.

문득, 허공이다. 바람이 분다. 노래방이나 갈까.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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