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블루스 W.H.오든
모든 시계를 멈춰라, 전화를 끊어라,
기름진 뼈다귀를 물려 개가 못 짖게 하라,
피아노들을 침묵하게 하고 천을 두른 북을 쳐
관이 들어오게 하라, 조문객들을 들여보내라.
비행기를 하늘에 띄워 신음하며 돌게 하고,
그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하늘에 휘갈기게 하라,
거리의 비둘기들 하얀 목에 검은 상장(喪章)을 두르고,
교통경찰에게는 검은 면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동쪽이고 서쪽이며 남쪽이고 북쪽이었다,
나의 평일의 생활이자 일요일의 휴식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우리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으나, 내가 틀렸다.
별들은 이제 필요 없다, 모두 다 꺼버려라,
달을 싸버리고 해를 철거해라,
바다를 쏟아버리고 숲을 쓸어버려라,
이제는 그 무엇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니.
*<오든 시선집-아킬레스의 방패>(봉준수 편역, 나남, 2009)에 훌륭한 번역이 수록돼 있다. 필자가 여기 또 하나의 번역을 보탠다.
영상이 있기 때문에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쓰러진 한 사람을 향해 물대포가 집중 살수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확인사살’이라는 말을 떠올리고는 그 말이 끔찍해 떨쳐냈는데, 그렇다면 저것을 ‘확인살수’라고 해야 하나 했다가, ‘살수(撒水)’라는 말이 ‘살수(殺水)’로 읽히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죽음이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라거나 또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부검을 하자거나 하는 말들이 들려온다. 하기는 바다로 가라앉는 학생들이 방치되는 장면을 함께 지켜봐놓고도 그것을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산 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미 죽은 사람도 다른 원인으로 한 번 더 죽어야 하는 노고를 겪는 곳이 우리가 사는 여기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이 아직 미처 다 죽지 못한 채 끌려다니고 있는 형국이니 그 죽음에 합당한 애도는 엄두를 내기도 어렵다. 우리 사회가 죽음을 애도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나는 오래전 어느 영화에서 본 인상적인 애도 의례를 떠올리게 됐고 뜬금없다 싶으면서도 그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을 다시 봤다. 새삼 느낀 것은 시종일관 경쾌한 ‘네 번의 결혼식’에 어떤 깊이를 부여해주는 ‘한 번의 장례식’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주인공 찰스가 속해 있는 비혼 친구들의 그룹에서 가장 연장자인 개리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의 파트너 매슈가 추도사를 낭독하는 장면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그때 매슈가 A. H. 오든의 ‘장례식 블루스’를 읽는다. 왜 하필 이 작품인가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둔감한 이성애자들도 눈치챌 수 있게 암시하고 있기도 하고, 에필로그에서 각자의 짝을 찾은 주요 인물들을 슬라이드처럼 보여줄 때 매슈 곁에 있는 남자를 통해 분명히 밝히고도 있듯이, 매슈는 게이다. 그가 수많은 비가(悲歌)들 중에서 굳이 오든의 이 시를 고른 것은, 오든 역시 게이였으므로 매슈가 오든 시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는 독자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대성공과 함께 급히 출간된 새로운 버전의 오든 시선집은 당시 영국에서만 30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영국 사회파 모더니즘의 대표 격인 시인이 이제는 이 아름다운 추도시로 기억되게 됐다.
이 시의 역사는 복잡하다. 최초 버전은 오든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함께 쓴 2막짜리 시극
(The Ascent of F6, 1936)에 발표한 것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극중 어느 정치인의 죽음에 부쳐진 시니컬한 작품이었다. 2년 후에 이 시가 벤저민 브리튼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장례식 블루스’라는 제목을 얻고 소프라노 헤들리 앤더슨에 의해 불리면서 지금과 같은 서정적 비가로 축약 손질됐다. 오든은 이 버전을 최종본으로 간주해 시집 <어나더 타임>(Another Time, New York, 1940)에 ‘미스 헤들리 앤더슨을 위한 네 개의 카바레 노래’라는 제목의 연작시 중 하나로 수록했다. 이후 그의 전집에는 제목 없이 ‘열두 개의 노래’ 중 9번으로 최종 안착된다.
이 시를 전반부(1~2연)와 후반부(3~4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반부에서는 장례식이 시작되기 위해 필요한 준비가 무엇인지를 적었다. 1연이 요청하는 것은 고요함이다. 시계, 전화, 개, 피아노 등 모든 것이 소리를 죽여야 하며 진행을 위해 필요한 북소리만 남아야 한다. (원문의 ‘muffled drum’은 소리를 낮추기 위해 천을 두른 북으로 흔히 장례식에 사용된다.) 2연이 요구하는 것은 동참이다. 하늘에 메시지를 적어 알려야 하고,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비둘기)도 가세해야 하며, 경찰도 조의를 표하며 질서를 관리해야 한다. 사랑을 잃은 나는 온 세상이 함께 슬퍼해야 한다고 믿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의 마음이 다른 마음일 수가 없다.
남은 후반부의 강력한 울림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렸다. 진정한 나를 찾느라 번민하는 이들, 혹은 너무 많은 나 앞에서 자신을 위선자라 자학하는 이들에게, 이 일본 소설가는 그냥 우리에게 여러 개의 나가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個人, 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分人, dividual)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이런 관점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사랑과 죽음의 분인론’과 함께 이제 3~4연의 절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3연이 하나하나 확인하듯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나의 모든 시공간적 좌표, 즉 내 삶에 안정성과 방향성을 부여하는 틀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이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후반부는 자기 자신을 장사지내는 사람의 말이다.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죽기 위해 사는 법>, 78쪽)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194쪽)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