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2000년 여름 무렵의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기 대장암이란 소문이 돌았다. 미국 동포사회에서 먼저 나돌더니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 시중에 퍼진 것이었다. 76살의 고령 탓에 ‘건강 이상설’은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대통령 건강상태를 알기 위해 비서실과 경호실을 백방으로 취재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말도 안 되는 루머’라고 일축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청와대도 이 소문을 듣고 처음엔 약간 당황했다고 한다. 대장암이 아니라고 믿었지만 100% 확신할 수는 없었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대장내시경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내시경보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초음파와 시티(CT) 촬영만으로 복부 검진을 했다. 그 이유는 수면내시경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수면내시경을 위해 마취제를 투약하면 한두 시간 정도 깊은 무의식 속으로 빠지는데, 짧지만 이 순간은 사실상 ‘대통령 유고 상태’가 된다. 희박하지만 호흡 기능 저하로 인한 긴급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김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걱정했다. 그래서 재임 중 단 한 차례 비수면으로 위내시경을 받은 것 외엔 일체 내시경 검사를 받지 않았다. 대장암 소문이 돌자 청와대 의무실은 대통령의 초음파 사진을 다시 꺼내 면밀히 검토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비단 김대중 대통령만이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 역시 5년간 내시경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 단 몇 시간이라도 심각한 상황으로 번질 수 있는 ‘국정 공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수면내시경 등에 주로 쓰이는 프로포폴과 ‘제2의 프로포폴’이라 불리는 에토미데이트리푸로주(에토미)가 최근 의혹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두 약물은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사들였거나, 최순실씨 단골병원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2014년 4월16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프로포폴이나 에토미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물론 없다. 그러나 재임 기간에 이런 약물에 기댄 적이 전혀 없다는 분명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 또한 없다. 사실, 중요한 건 약물 사용 여부가 아니다. 필요하면 수면내시경을 할 수 있고, 불면증을 완화하는 처방을 받을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척추를 다친 존 에프 케네디는 백악관 시절 줄곧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고 매일 진통제와 항우울제 등 8가지 약을 복용했다. 진짜 문제는 청와대의 누구도 박근혜 대통령이 정확하게 어떤 의료적 처방을 받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월호 7시간 공백’에 대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2년 전 국회에서 “대통령은 일어나시면 출근이고 주무시면 그게 퇴근이다. (청와대 경내) 어디서나 집무를 볼 수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더니 최근엔 같은 질문에 “대통령 말을 믿지만 사실 그걸(시술을 받았는지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여성 대통령이라, 결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비서실장도 대통령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기관지염 등으로 재임 중 두 차례 입원했다. 이 사실은 비서실장을 통해서 국민에게 공개됐다. 그게 오히려 헛소문을 막았다. 정말 걱정스러운 건 소문이 아니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의식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혹시라도 ‘세월호 7시간’은 그런 경우는 아닐까. 어쩌면 더 심각한 공백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런 끔찍한 상상에 청와대의 누구도 답변하질 않는다. 대통령이란 자리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탓이다. pc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