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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개헌은 당신들의 놀잇감이 아니다

등록 2017-03-05 16:33수정 2017-03-06 14:23

김보협
디지털 에디터

헌법보다 헌장을 먼저 알았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 말이다. 막 코흘리개를 면한 아이들, 국민이라 쓰고 왜 ‘궁민’으로 발음하는지도 모를 아이들에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너무 버거웠다. 모든 교과서의 첫 장을 장식했던 이 헌장을 외우지 못한 아이들은 얻어맞았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대한민국 헌법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길고 긴 학창시절 왜 헌법을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을까. 언제 무슨 일로 헌법을 고쳤다거나 국민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앞세운 사실을 달달 외웠지, 하나의 문장으로 이뤄진 헌법 전문에 오롯이 새겨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배우지는 못했다. 특히 유신헌법을 제외하곤, 헌법이 만들어진 1948년부터 현행 헌법까지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어떤 의미인지, 왜 선거 때를 빼고는 아무 힘이 없어 보이는 국민에게만 ‘권력’이 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온 국가기관에는 ‘권한’밖에 없다고 표현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헌법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적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거나 상대방을 “위헌세력”이라고 공격하는 자들의 창이었지, 주권자인 국민들의 방패가 아니었다.

그런 헌법을 제대로 배운 곳은 광장이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때 <헌법 제1조>를 따라 부르며 헌법을 다시 봤다. 2016년 말 다시 켜진 촛불광장에서 방송인 김제동씨의 생동감 넘치는 헌법 강의를 듣자 다른 조문들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대통령중심제니 내각제니 하는 권력구조는 부분이거나 도구임을, 헌법을 고친다면 권력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확장하고 명징하게 만드는 게 우선임을.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상상을 시작했다.

개헌을 하게 된다면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두 가지를 제안할 생각이다.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추가됐으면 한다. 직접민주주의를 하자는 건 아니다. 상식을 가진 국민 대부분이 청와대에서 농성중인 대통령 박근혜씨가 법에 따라 처벌받기를, 특검이 연장돼 그 막중한 책무를 마무리짓기를 바라는데 왜 정세균 국회의장이나 황교안 국무총리 입만 바라봐야 하는가. 지방자치단체장은 소환할 수 있는데 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그리 못하는가. 주권자의 얼마 이상이 원하는 법안은 어느 정당이, 어느 상임위가, ‘꼴통’ 의원 몇몇이 가로막더라도 본회의에 직권상정되는 법은 왜 없는가.

의무교육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쉽고 간결하게 쓰였으면 좋겠다. 광장의 언어에 가깝게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등교육 과정의 한 학기 정도 헌법에 대해 고민하고 상상하는 시간을 갖기를 희망한다. 헌법이 시민들의 삶에 가깝게 다가오도록.

현재 집권여당인 자유한국당에서 다음에 집권할 가능성이 높은 더불어민주당의 일각까지 넓게 퍼진 개헌파 중에 이런 고민을 하는 의원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조만간 펼쳐질 권력재편기에 자신의 자리가 없는 이들이 모여 판을 흔들어보겠다는 욕심이 더 커 보인다. 집안살림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지금은 탄핵과 탄핵 이후에 집중할 때다. ’박정희 패러다임’으로 상징되는 친일과 독재의 적폐를 청산하는 과업이 우선이다. 게임의 룰을 바꿔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는 데에 골몰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개헌은 그런 자들의 놀잇감이 돼서는 안된다. 헌법은 주권자의 것이다.

bhkim@hani.co.kr

*편집자주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어서 바로잡습니다. 애초 ‘헌법이 처음 만들어진 1948년부터 현행 헌법까지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이라고 썼는데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1조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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