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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마침내 진실이 결정하게 하소서

등록 2017-03-20 18:25수정 2017-03-21 13:31

김종구

‘3년의 기다림, 진실이 마침내 올라온다’. 세월호 선체 인양 작업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20일 아침 <한겨레> 1면 기사의 제목이다. 그렇다. ‘마침내’다! 1000일 넘게 깊은 바닷속에 수장돼 있던 세월호 선체가 마침내 물 위로 올라온다. 유족들뿐 아니라 수많은 국민이 애타게 기다려온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물 위로 떠오를 날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마침내’는 또 다른 한편에서도 전개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마침내 21일 오전 검찰에 출석한다. ‘3년의 기다림’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마침내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박 전 대통령과 세월호 간에 연결된 끈이 너무나 단단하다.

“새벽의 꿈에, 배 빠진 맹골수로에도 4월이 와서 봄빛이 내리는 바다는 반짝이는 물비늘에 덮여 있었다. 그 바다에서 하얀 손목들이 새순처럼 올라와서 대통령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고, (…) 손목들은 사람 사는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 소설가 김훈의 글 ‘세월호’ 중 가장 심금을 울리는 대목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하얀 손목들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 밑의 장차관들은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 손목들을 매몰차게 걷어찼다. 가엾은 손목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런 대통령, 그런 정권이 온전할 리 없다. 세월호 선체 인양과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 예정 기사가 ‘마침내’라는 단어와 함께 ‘동시 등장’한 것은 필연이라 해야 옳다.

박 전 대통령이 어떤 표정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설지는 알 수 없다. 예고한 메시지 발표 내용이 어떤 것인지도 속단하기 힘들다. 다만 최근의 ‘삼성동 동향’을 보면 그동안의 오만한 모습을 감추고 국민의 측은지심을 자극할 가능성도 크다. 그에 대한 동정론은 이미 화해와 통합의 외피를 쓰고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그만큼 했으면 분이 풀릴 법도 한데 그를 굳이 법정에 세우는 것은 대선에도 안 좋고 나라 안정에도 안 좋다” “그 정도 했으면 앞을 보고 나갔으면 한다”는 따위의 주장이 그것이다.

화해와 통합은 아름다운 단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진정한 화해는 용서에 기반하는데, 진실을 알지 않고서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티머시 타이슨은 “화해가 있으려면 먼저 진실이 있어야 한다”고 더욱 간명하게 정리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진실을 알지 못한다. 특히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는 아직 진실이 온전하게 밝혀진 게 없다. 당사자가 참회와 반성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니 화해니 하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난센스지만, 이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엇이냐다.

베일에 싸인 것은 단지 ‘7시간 미스터리’만이 아니다. 7시간은 진실을 향한 첫출발일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시 ‘성실한 직책수행 의무 위반’을 했음은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의 보충의견을 통해서도 충분히 드러났다. 하지만 더 주목할 대목은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의 행위다. 7시간 동안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 ‘부작위의 잘못’이라면, 세월호 진상 규명 노력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유족들을 정치적 불순행위자로 몰아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은 ‘작위의 잘못’이다. 전자가 무능하고 개념 없는 대통령의 표상이라면, 후자는 악랄하고 고의적인 권력 남용이다. 죄질 면에서 후자가 훨씬 용서받지 못할 나쁜 행위다.

적지 않은 사람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처벌이 대통령 선거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한 보수신문의 논객은 유권자들 사이의 역풍을 거론하며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야권 주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걱정’도 해준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만약 그것이 대선에 영향을 끼쳐 정권교체에 걸림돌이 된다 한들 그것 역시 대한민국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다.

미국의 저명한 인권변호사인 브라이언 스티븐슨은 “진실과 화해를 함께 요구하지 말고 진실을 요구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나서 스스로 그 진실과 화해하길 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은 “화해는 정의와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해가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제 4월이 오면 아랫녘 바다에도 봄빛이 내리고 반짝이는 물비늘에 덮일 것이다. 그 바다에서 새순처럼 돋아나는 하얀 손목들이 결정하게 하라.

편집인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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