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파원 커다란 여행용 가방 두 개를 질질 끌고 도에이 아사쿠사선 닌교초역에 내린 것은 2013년 9월14일이었다.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앞으로 3년 반 동안 살게 될 집 열쇠를 받아 오는 것으로 ‘길고도 짧았던’ 일본 생활이 시작됐다. 이제 귀국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특파원 칼럼을 쓰다 보니, 당시의 설레고 긴장되던 마음이 생각나 왠지 짠한 감상에 젖게 된다. 내가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야말로 우연한 것이었다. 2004년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 담당이었던 내 ‘나와바리’(담당 구역) 안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있었다. 친일 청산 등 ‘역사 바로세우기’를 중요 국정과제로 삼았던 노무현 정권 시기였다. 연구소를 들락거리며 새롭게 친일 혐의가 밝혀진 인물들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연을 듣고 와 여러 기사를 썼다. 그렇게 시작된 일본 관련 취재가 벌써 13년에 이른다. 일본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전, 내가 알던 일본은 ‘따뜻한 시민사회의 일본’이었다. 2005년 10월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일본 시민사회는 식민지 시기 일본 정부가 한국과 대만에서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격리 정책을 펴 인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 1심 판결의 취재였다. 한국 대법원은 지난 2월에야 자국 한센인들에 대한 ‘단종·낙태 수술’에 대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보다 11년 전인 2006년 외국인인 소록도 한센인들에게도 1인당 8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취재는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에 급호감을 느낀 뒤 일본어가 공부하고 싶어져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나의 첫 일본어>라는 초급 문법책을 샀다. 이후 한·일의 우호협력을 원하는 선량하고 따뜻한 수많은 일본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부임하면 건전한 일본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자주 소개해 한-일 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을 거듭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민주당 정권의 허무한 몰락 이후 ‘재등장’한 아베 신조 총리는 건전한 한-일 관계의 기반이 돼 왔던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를 사실상 해체했다. 그가 2015년 8월 발표한 아베 담화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행한 식민지배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담화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자녀나 손자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기묘한 ‘자기 연민’이었다. 이후 아베 총리는 일본의 평화주의를 훼손하는 안보 관련법을 개정했다. 최근 일본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모리토모학원 스캔들이 수습되고 나면 자신의 ‘필생의 과업’인 개헌을 위해 본격적인 여론몰이를 시작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2000년대 ‘한류’ 붐으로 상징되는 한-일 관계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것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이었다. 이 문서의 기반이 된 것은 무라야마 담화와 일본인들이 오랜 시간 자랑스럽게 지켜온 평화헌법이다. 아베 총리가 한-일 간의 우호·협력을 지탱했던 이 두 가지 전제 모두를 부정했으니, 이제 우린 무엇을 근거로 양국의 미래를 논해야 할지 안타까울 뿐이다. 한-일 간의 불화는 이미 구조화의 단계로 접어든 것인지 모른다. 과거사는 접어두고 안보 협력을 강화하자는 일본과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한국 사이의 갈등은 장기화될 것이다. 위안부 문제 등을 매개로 지난 4~5년 동안 벌어진 한-일 갈등은 어쩌면 앞으로 닥치게 될 거대한 파국의 초입에 불과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3년 반에 걸친 내 특파원 생활도 결국 처절한 실패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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