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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이택 칼럼] 또다른 ‘미투’들

등록 2018-03-20 01:00수정 2018-03-20 10:01

김이택 논설위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미투운동의 뿌리를 위안부 할머니들한테서 찾았다. 할머니들의 용기가 우리의 감춰진 역사를 들춰내고 부끄러운 양심을 뒤흔들었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미투 운동과 많이 닮았다.

우리 사회 왜곡된 성의식의 밑바닥엔 ‘배꼽 아래 관용’ 악습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배꼽 아래엔 인격이 없다’는 일본식 성문화에 세뇌된 권력층 사이엔 더 깊게 각인돼 있다. 대통령이 안가까지 만들어놓고 당대의 유명 배우 등 연예인들을 불러들여 성노리개로 삼았는데도 수십년간 쉬쉬했다. 독재시대엔 최고권력자의 은밀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우리 사회는 40년간 사실상 그의 행각을 덮어왔다. 민주화 이후에도 언론 등이 본격적으로 파헤치지 못한 데는 피해자 인권에 대한 고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투운동처럼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단서들은 이미 충분했다.

10·26사건 재판 과정에서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등을 통해 궁정동·세검정 안가에서의 비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사극에 나온 어린 배우가 수영복 차림으로 캘린더에 실린 것을 보고 대통령이 경호실장에게 ‘어린 줄 알았는데 성숙하구먼’이라고 말하면 실장이 금방 의전과장에게 연락해 급히 촬영 현장에 가서 체포하듯이 데려와야 했다’. 박 과장은 법정에선 “제가 답변하면 지금 일류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분들께 역효과가 납니다.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라며 자세한 언급을 피했으나 변호인 접견 때는 상당히 많은 얘기를 했다.(안동일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미녀 찾기’는 주간지 표지사진이나 티브이 시청에서 시작되고, 경호실장이 티브이 등을 보다 지명한 경우도 30%나 됐다고 한다. 접견 때 변호인에게 ‘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 안가를 다녀갔다’는 말도 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도 변호인 접견 때는 “(궁정동 안가 다녀간 연예인 중에) 임신해서 낙태한 사람도 있고…간호 여성이 임신해서 애먹기도 하고…”라고 털어놓았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피해자들이 나서지 못해 가려져 있었을 뿐, 건드릴 수 없는 최고권력의 ‘위력’으로 성을 착취했다는 점에서 최근의 미투운동 고발 사실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지난 7일 장자연씨 9주기를 맞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선 장씨 사건을 재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청와대 게시판에는 재수사를 촉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미 1월엔 148개 여성단체들이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당시 충격에 비해 졸속으로 마무리된 이 사건 배후에도 또다른 ‘권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장씨가 남긴 글에서 드러난 억울한 죽음의 본질은 자신을 노리개 삼은 성착취였다. 그런데 그 가해자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가 폭력이나 모욕죄 등 곁가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이다.

사건 2년 뒤 장씨가 썼다는 다른 글(나중에 가짜 필적으로 판정)이 공개돼 파문이 일자 <조선일보>는 곧바로 ‘문건에 장씨가 쓴 조선일보 사장은 <스포츠조선> 전 사장으로 명백히 확인됐다’(2011년 3월9일치)며 진화에 나섰다. 방상훈 사장 불기소 결정문까지 공개하면서 사실상 스포츠조선 전 사장이 누구를 뜻하는지 특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당사자는 관련 사건 법정에 증인으로 나서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증거까지 제시하며 ‘인격 살인’이라고 반발했다.

최근 당시의 수사·재판 기록 등을 들춰봤다. 장씨는 그 문건에서 ‘조선일보 방 사장’이란 표현을 썼고 조선일보와 스포츠조선도 구분해서 사용했다. 주목할 것은 장씨가 어머니 제삿날임에도 불려나가 차 안에서 울었다는 2008년 10월 술자리에 등장하는 조선일보 사장의 ‘가족’이다. 기획사 대표와 미국에서 공부할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대표는 행사 뒤 새벽 1시22분에 장씨에게 ‘말조심’하라는 문자까지 보내 입단속을 시켰다. 술값으로 200만원이나 지불하는 등 미심쩍은 대목이 여럿인데도 경찰에 이어 검찰도 ‘그날 성접대한 게 아니냐’고 한마디 묻고는 대표가 부인하자 더이상 파헤치지 않았다.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26일 장씨 사건 등을 추가조사할지 결정한다. 막강한 권력의 힘으로 감춰온 또다른 #미투의 진실들이 밝혀져, 배우로 성공하길 꿈꿨던 장씨를 비롯해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뒤늦게나마 풀리길 기대한다.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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