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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대통령의 분노가 스스로를 망쳤다

등록 2018-10-08 14:47수정 2018-10-09 15:16

이명박 전 대통령을 권력의 일탈로 몰아간 건 아마도 ‘분노’였을 것이다. 분노는 칼자루를 쥔 권력자에겐 금지선을 넘어서라고 유혹하는 악마와 같다. 그러니 분노하지 말자. 권력은 냉정할 때 가장 예리하다.

“다시는 대통령이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함부로 남용하여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피고인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6개월 전인 4월6일 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판결문의 일부다.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며칠 전 이명박 전 대통령을 향해 장문의 판결문을 읽어내려가던 판사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미리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 문장이 이 전 대통령 판결문인지 아니면 박 전 대통령의 것인지 알아차리긴 쉽지 않다. 순서는 바뀌었다. 1심 재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먼저 끝났지만, 대통령직을 먼저 수행한 건 이명박이었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하려” 엄중한 책임을 물었던 ‘박근혜 재판부’의 판단은 아무 소용이 없었던 셈이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두 전직 대통령의 잘못은 너무 흡사하다. 두 개의 판결문을 관통하는 핵심 죄목은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한을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그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더욱 아픈 지점은,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 점이다. 앞으로 어떤 대통령도 예전과 같은 존경과 믿음을 얻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두 명의 대통령이 연달아 국민을 배신하고 민주주의 통치의 근간을 뒤흔든 이 시기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그래도 교훈은 있다. 정권을 주고받은 대통령이 함께 사법처리를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내란죄에 천문학적 뇌물죄까지 더해져 복역했고,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노태우씨가 직선으로 선출되긴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군부독재 정권의 일원으로 정상적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 인정하긴 어렵다. 이들의 뒤늦은 구속은 역사의 교훈으로 남았다. 2년 전 촛불집회 시기에 이뤄진 기무사의 계엄계획 작성이 군의 광범위한 반동으로 확산되지 않은 데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전-노 두 사람에 대한 단죄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한발짝 더 앞으로 나아간다.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의 중형 선고에서, 과거 ‘통치행위’란 이름으로 감쌌던 권력의 일탈이 이젠 법률과 규정에 근거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건 너무 교과서적이다. 권력의 심장부에 최고 통치자가 아닌 다른 여인이 들어앉아 심령술사처럼 사람들을 조종하고 나라를 다스렸다는, 기담에나 나올 듯한 스토리가 21세기 현대국가에서 언제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박 전 대통령의 몰락은 시간문제였을 뿐 필연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숱한 의혹과 논란에도 임기 마지막까지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한 것처럼 보였다. 퇴임 시점에 그의 지지율은 23%(한국갤럽 조사)로, 김대중 대통령(24%)과 엇비슷했다. 그런 이명박씨가 실제로는 박근혜 시기 참담한 국정농단의 길을 텄고, 민주주의 파괴의 광범위한 기반을 닦았다는 수사 결과는 비극적이다.

지난주의 1심 선고가 이 전 대통령에겐 끝이 아니다. 다스 실소유 논란보다 훨씬 무거운, 국가기관을 동원한 불법사찰과 여론조작, 표현의 자유 침해 혐의가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를 권력의 일탈로 몰아간 건 아마도 ‘분노’였을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지지율이 급락한 2008년 하반기, 이 전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댓글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별것도 아닌 일’로 자신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야당과 진보진영에 맹렬한 분노를 느꼈으리라. 이것이 국정원을 불법적인 댓글공작에 뛰어들게 했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군 사이버사령부와 경찰까지 댓글을 달고 여론을 조작하며 정치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국가기관의 총체적 일탈은 그렇게 한순간의 분노에서 시작됐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엔 베트남전 기밀문건을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에 온갖 욕설을 퍼붓는 닉슨 대통령의 전화 목소리가 나온다. 그 분노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졌다. 분노는 칼자루를 쥔 권력자에겐 금지선을 넘어서라고 유혹하는 악마와 같다. 그러니 분노하지 말자. 권력은 냉정할 때 가장 예리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를 지켜보며, 모든 분야의 권력을 쥔 이들이 한번쯤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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