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의 날인 지난 8일 클럽 ‘버닝썬’이 있던 서울 역삼동 르메르디앙 호텔 건물 앞에서 시위 참여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최근 ‘버닝썬 사건’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여러 논점이 혼재돼 있지만 ‘정준영 사건이 장자연 사건을 물타기 한다’거나 ‘경찰 유착이란 본질이 연예인 사건에 길을 잃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권력기관의 수사권 조정 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검경의 과거 행태, 카카오톡 대화와 피해자 좇기에 집중된 일부 보도, 큰 사건 때마다 스캔들이 터졌던 사례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 법한 말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해 ‘#미투가 MB문제를 가리고 있다’는 논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권력층의 ‘어둡고 화려한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자연 사건이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에 대해선 대부분이 분노한다. 그런데 권력층의 부정부패만큼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라는 사실에도 분노하는 걸까. 특히 김학의 사건의 경우, 오랜 세월 ‘뇌물’이 핵심이지 성폭력이란 본질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나서 “살려달라”고 외치지만 여전히 일부에겐 ‘성접대’ 의혹에 방점이 찍혀 있다. 버닝썬이나 승리·정준영 사건 또한 경찰 유착 의혹이 불거지지 않았다면 유흥업소의 일탈이나 몇몇 연예인들의 추잡한 스캔들로 끝났을지 모른다.
정준영의 카톡에서 동영상 촬영이나 공유만큼이나 충격적인 건 그들의 대화 태도였다. “빨리 여자 좀 넘겨요. ○같은 ×들로” “누구 줄까” “형이 안 ***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냥 예쁜 ×”.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미안하지만 키우던 강아지, 아니 입던 옷을 넘길 때도 이러진 않는다. 남학생들 단톡방에서 여학생들을 품평하고 성희롱하다 여론의 도마에 오른 사례는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다. 이젠 ‘무서워서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한 대학에서 또 의혹이 불거졌다. 하긴 지구촌을 에스엔에스의 신세계로 인도한 페이스북이 하버드대 여학생들 얼굴품평 사이트 ‘페이스매시닷컴’에서 시작됐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승리·정준영 사건, 단톡방, 그리고 몰카라는 ‘가벼운 이름’으로 불려온 불법촬영물에서도, 여성은 일관되게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성적 도구거나 지배 가능한 대상일 뿐이다. 사실 양상과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거에도 흔한 일이었다. ‘자빠뜨렸다’거나 ‘*먹었다’ 같은 표현을 쓰며 성관계를 자랑삼는 건 일종의 ‘남성문화’로 받아들여졌다. 여성의 ‘아니오’는 ‘예’였고, 남성들이 룸살롱 한두번 가는 건 당연시됐다. 이후 사실관계를 부인했지만,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짝사랑에 고민하는 친구를 위해 돼지흥분제를 구하는 논의를 했다고 적어놓은 자서전 챕터엔 어이없게도 ‘꿈꾸는 로맨티스트’라는 낭만적 제목이 달려 있었다. 설사 ‘아무 여자’가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라 하더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20세기 하숙집의 돼지흥분제는 21세기 클럽의 ‘물뽕’이다.
과거 돼지흥분제를 이용해 강간 모의 및 방조 논란이 있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 사진 연합뉴스.
이번 사건을 두고 ‘강간문화’라는 표현이 나오는 데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일부의 파렴치한 범죄를 일반화할수록, 남성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 반감만 키운다’는 지적은 존중한다. 하지만 이런 구조와 문화를 충격적으로 드러내는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이다.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 속 공포와 억압은 ‘피해망상’이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93.5%는 여성이며, 경찰에 직접 신고한 비율은 2.2%에 불과하다. 2009~2017년 배우자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824명이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는 “여성을 소비·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차별적 인식의 극단적 형태가 폭력 아니냐”고 물었다.
누구나 우리 사회가 고통받는 이 없는, 보다 선한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만으론 부족하다. ‘왜 젠더 갈등을 조장하냐’고 묻기에 앞서, 자신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런 남성문화가 반복되는 성범죄의 너그러운 배경이 되어온 건 아닌지 질문을 던질 때 아닐까.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함께 “사나흘에 한명꼴로 여자가 맞아 죽던 무식한 야만의 시대가 있었대”라는 말을 나눌 그날이 오길.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