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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진형 칼럼] 2019년 이른 봄, 대한항공 주총에서

등록 2019-04-02 18:10수정 2019-04-10 16:52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조양호씨(이하 존칭 생략)가 대한항공 이사회에서 축출되었다. 재벌총수 가족이 주총을 통해 이사회에서 밀려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점에서 이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하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 일부 언론에선 그가 경영권을 박탈당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헛소리다. 그가 대한항공을 좌지우지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으니 말이다. 올해 조양호는 지주회사 한진칼, 그룹 모태 ㈜한진, 핵심 계열사 대한항공 등 3개사 이외의 계열사 겸직을 내려놓기로 했었다. 그는 최근까지 이 3개 회사를 포함해 자그마치 총 7개사의 등기임원을 맡고 있었고 다른 2개사는 비등기임원으로 겸직 중이었다. 3개만 하겠다고 했는데 그중 대한항공에서 밀려났으니 앞으론 지주회사인 한진칼과 ㈜한진에서만 대표이사로 일하게 된다.

모회사인 지주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사람이 자회사 대표이사를 겸직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지주회사는 원래 지분을 통해 자회사를 통솔하는 곳이다. 게다가 아들인 조원태씨가 대한항공 대표이사이고 다른 사내이사들도 모두 자기 심복이다. 그리고 한국의 재벌총수가 언제는 이사회 멤버로 경영을 했나?

당분간 월급은 줄어들 것이다. 그는 한국 최고의 월급쟁이였다. 작년 상반기 한국에서 스톡옵션 행사 없이 가장 많은 보수를 받은 상장사 임원이 바로 조양호였다. 그는 지난해 대한항공 31억원을 포함해 5개 계열사에서 약 107억원을 보수로 받았다. 이번 이사 연임 실패로 급여가 연간 31억원 깎인다. 혹시 아는가, 그 두 회사에서 앞으로 월급을 올려줄지. 그는 자기 월급을 자기가 정하는 사람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국민연금이 조양호의 연임에 반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1년 3월 이명박 정권 시절 국민연금은 한진의 조양호 이사 선임안에 과도한 겸임 등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다. 2014년 3월에도 국민연금은 조양호와 그의 아들 조원태(한진·한진칼)의 사내이사 선임안에도 같은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또 2016년 대한항공 주총, 2017년 한진칼 주총에서도 연거푸 그의 이사 선임에 반대했다. 게다가 그는 작년에 횡령 배임으로 기소까지 되었다. 이런데도 국민연금이 그의 연임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이번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연금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품이 난다. 그 말이 얼마나 게으르고 치졸한 색깔론인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러면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시절 국민연금이 반대한 것은 뭐라고 할 건가? 그런 식이면 한국에서 연금사회주의의 시조는 이명박이고 이를 계승해서 발전시킨 게 박근혜다. 그때 하던 것은 연금자본주의이고 지금 하는 것은 연금사회주의인가?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주총 안건 607개 가운데 실제로 부결된 것은 단 7건이었다. 계산을 해보진 않았지만 올해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국민연금은 조양호 회장이 270억원대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배임·횡령죄로 금고 이상 형이 확정된 이사는 이사직을 즉시 상실한다’는 내용의 정관변경 주주제안을 지주회사인 한진칼 주총에 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범법자를 이사회에서 쫓아내는 것은 다른 나라에선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외국에선 아예 상장규정이나 감독규칙을 통해 상장사만이 아니라 비상장사라고 해도 범법자가 회사의 이사직을 맡을 수 없게 한다.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 설화로 미국 증권감독당국에 걸려 대표이사직에서 축출될 뻔한 것이 겨우 몇달 전이다. 횡령배임자 축출 조항을 굳이 정관에 넣자는 얘기를 해야 하는 것부터가 한국 사람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런데 그 안건에 대한 찬반 비율이 비슷하게 나왔다. 어쩌겠나? 그게 한국이다.

이번 대한항공 조양호 축출 건이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실제적인 의미는 크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변화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려면 정부가 자기 집 청소부터 해야 한다. 제일 큰 청소는 국민연금기금을 독립기관화하는 것이다. 작은 청소거리도 빠트리면 안 된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반대하는 사람을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는 짓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다보니 주총을 코앞에 두고서야 겨우 자기들 입장을 정했다.

하기 싫어하는 관료에게 일을 맡기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정부가 일머리를 모르고 무능하단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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