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그동안 역사 문제에 대해 한국에 품고 있던 불만을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한국은 국제질서를 존중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보수 미디어와 우파들은 여기에 한국은 논리보다는 감정이 앞선다는 평을 덧붙이곤 한다. 이들은 강제징용 문제가 1965년 ‘한-일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완전히 끝난 문제라는 논리를 폈다. 협정에는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과의 평화조약 제4조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는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합의했으니, 양쪽이 합의를 이행할 일만 남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는 강제동원 및 위안부 피해자가 입은 피해에 정면으로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또한 한-일 청구권 협정의 경우에는 이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본 변호사들도 지적한다. 다만, 일본 정부 나름의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수긍이 가는 면도 있었다. 적어도 지난해 말까지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제질서와 약속 자체의 중요성이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 자체에 대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1988년 중단한 상업 포경을 2019년 7월 재개하고 국제포경조약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고래 자원이 회복 추세이고 고래잡이는 일본의 오랜 문화라는, 국제적인 흐름과 어긋나는 탈퇴 이유를 내세웠다. 올해 4월에는 후쿠시마를 포함한 주변 8개 현 수산물 수입 금지와 관련해 한국과 다툰 세계무역기구 소송 항소심에서 패하자, 세계무역기구가 분쟁 해결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국제질서와 국제법, 약속 자체의 중요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왔지만,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태도가 달라졌다. 일본 정부가 지난 1일 반도체 소재 등 3가지 품목의 수출 규제 강화 조처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번에도 “양국 신뢰관계 손상”을 이유로 들었다. 대법원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대항 조처”라고 일본 내부에서도 봤지만, 일본 정부는 대항 조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수출 규제 조처 발표 이틀 전인 6월29일 폐막한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롭고 공정하며 무차별적인 무역 환경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선언 작성을 주도했다. 일본 내에서도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주장한 자유무역 정신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안보상의 이유”를 최근 강조하면서 무역 관리 정책의 일환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 아베 정부가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지지층인 보수표 결집만을 노리고 느닷없이 이런 조처를 내놓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법원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 뒤 쌓여온 일본 내 불만 같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어떤 보복 조처를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온 흔적이 보인다. 일본의 이번 조처를 보면서 ‘국제질서’라는 단어의 뜻이 과연 무엇일지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garden@hani.co.kr
이슈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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