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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평준화, ‘제대로’ 보완하자 / 이종규

등록 2019-07-17 17:23수정 2019-07-18 14:20

이종규
디지털부문장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4년, 한국 사회는 고교평준화 논쟁으로 홍역을 앓았다. 그해는 평준화 시행 30년이 되는 해였는데, 보수 언론이 ‘평준화 해체의 원년’으로 삼으려는 듯 총공세에 나선 것이다. 언론은 연일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평준화는 ‘학력 저하와 사교육비 증가의 원흉’이라는 오명을 꼼짝없이 뒤집어써야 했다. ‘평준화라는 사이비 종교에서 깨어나라’고 선동하는 사설이 실릴 정도였다. 한국교육개발원과 대학교수들이 2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그런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실증적으로 분석해냈지만 보수 언론은 폄하하고 왜곡하기 바빴다.

그 연구의 결론은, ‘평준화 지역 학생들이 비평준화 지역보다 학업성취도가 높고, 사교육비도 덜 쓴다’는 것이었다. ‘입시목적고’ 논란을 빚던 특목고의 ‘학교교육 효과’로 인한 성적 향상도 없다고 결론을 냈다. 상위권 학생들의 수월성 교육을 위해 특목고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다. 다음날 보수 언론이 어떻게 보도할지 궁금했는데 ‘역시나’였다. 말꼬리 잡기식 비난이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연구에 참여한 교수가 블로그 게시판(이름이 ‘오직 그리고 온전한 진실을 향하여’였다)을 통해 반박에 나섰을까. 당시 교육 담당 기자로서 한국의 교육 문제가 얼마나 ‘정치화’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최근의 자사고 일반고 전환 논란도, 따지고 보면 15년 전 평준화 논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자사고도 평준화 보완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일반고 전환 반대 논리도 평준화 폐지론자들의 구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향 평준화, 학교 선택권 침해, 교육 획일화….

평준화는 끊임없이 ‘특별한 학교’를 세워 ‘보완’해야 마땅한 제도일까. 평준화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애초 평준화는 ‘무시험 학교 배정’(고교입시 폐지)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3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자 단행한 조처였다. 무시험 배정을 하려면 어느 학교에 가든 균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평준화는 이런 차원에서 생긴 용어다. 따라서 교육당국은 지속적인 평준화 정책을 펴 균등 교육을 실현했어야 했다. 저소득층 지역 학교에 더 많은 지원을 하는 ‘어퍼머티브 액션’(약자 우대 정책)을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처럼 교육 형평성을 높이는 조처가 진정한 의미의 평준화 보완이라 할 수 있다(‘보완’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함’이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평준화 보완을 명분으로 선발 특권을 누리는 ‘평준화 예외 학교’를 늘려왔다. 교육을 통해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하려는, ‘구매력’ 있는 계층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교육 격차는 심화하고 평준화는 와해 지경에 이르렀다. 애초 평준화 보완론자들이 원했던 것은 ‘보완’이 아니라 ‘해체’였는지도 모른다.

평준화 논쟁 때마다 등장하는 ‘교육 획일화’ 비판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실 평준화는 획일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한국에서 교육을 획일화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학벌주의와 입시경쟁이다. 획일화가 평준화 탓이라면, 그 예외 학교인 특목고와 자사고에선 다양한 교육이 이뤄졌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명분은 그럴싸했지만, 거의 예외없이 입시명문고로 변질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입시’라는 강력한 깔때기가 존재하는 한, 학교 유형을 다양화한다고 해서 교육의 다양성이 담보되지는 않는다. 입시 실적을 기준으로 서열화가 이뤄질 뿐이다.

물론 교육에서 다양성은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다양화가 분리와 배제, 차별을 수반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다양한 교육은 모든 학교가 추구해야 할 목표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17일 일반고 지원 방안을 발표하면서 밝혔듯이, 지금 선진국들은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excellence for all)으로 나아가고 있다. 고교 학벌이 사라지고 모든 학교에서 균등하고 다양한 교육이 이뤄질 때 비로소 ‘모두를 위한 수월성’도 가능해진다. 계층 차별적인 욕구와 이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모두가 행복한 교육’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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