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언론들이나 자유한국당에는 주화파라는 이름조차 과분하다. 이들은 슬픈 척하면서 기뻐하고, 한탄하면서 쾌재를 부르고, 울면서 노래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기해왜란’의 국난을 일본의 힘을 빌려 ‘기해반정’을 도모할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고 있다.
편집인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소설 <남한산성>의 책머리에 작가 김훈이 쓴 글의 한 대목이다. 놀랍게도 38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의 상황에 대입해도 별로 틀림이 없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처 이후 우리 사회는 내부를 향한 언어의 백병전이 치열하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을 필두로 한 척화파보다 주화파인 최명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일까, 곳곳에서 주화파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의(義)를 세운다고 이(利)를 버려서야 되겠는가” “자존(自尊)보다 생존(生存)이 먼저다”…. 어느 것이 1637년 최명길의 말이고, 어느 것이 2019년 주화파들의 주장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우선 분명히 해둘 것은, 극우 언론들이나 자유한국당에는 주화파라는 이름조차 과분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슬픈 척하면서 기뻐하고, 한탄하면서 쾌재를 부르고, 울면서 노래하는 자들이다. 현 정권이 거꾸러질 수만 있다면, 경제가 거덜이 나고, 민생이 더욱 도탄에 빠지고, 일본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 한들 마다치 않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작금의 사태는 ‘왜침’이 아니라 남한이 먼저 도발한 ‘남침’이고, ‘기해왜란’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저지른 ‘기해문란’이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일본의 힘을 빌려 ‘기해반정’을 도모할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고 있다. 눈길은 오히려 다른 부류의 주화파들에게 쏠린다. 주변을 살펴보니 평소 일본에 대해 잘 알고, 경제에 능통하며, 국제 문제에 해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주화론에 기울어 있다. 이들은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는 국민의 아둔함을 안타까워하고, 소리만 요란한 비분강개와 명분론을 냉소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모르는 용기 부족을 한탄한다. 이들의 충정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판단이 옳은가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우선 주화파들이 정말 일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처에 대해 “예견된 보복”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무도한 공격’을 미리 내다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본인 특유의 ‘다테마에’(겉마음)와 ‘혼네’(속마음)의 실체를 모두가 보고 있지만, 혼네의 최종 지향점과 종착점이 어디인지에 대한 물음에는 주화파들도 입을 다문다. “치밀한 분석과 냉정한 대응”을 말하지만 정작 ‘치밀한 분석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풀어주지 않는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한 비판과 우려, 평가절하도 마찬가지다. 물론 거대한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는 마당에 소비재 제품 안 사기 운동 따위가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행주치마의 돌멩이’가 조총의 위력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싸움은 결국 우리가 지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그 싸움은 지게 돼 있다. 한-일 관계는 ‘비 온 뒤 굳어지는 진흙땅’이 될 수 없다. 격렬한 물꼬 싸움을 치른 농부들이 가뭄이 끝나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사이좋게 품앗이를 하는 사이로 돌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양국의 본질적인 신뢰 관계는 깨졌다. 안타깝지만 우리에게는 ‘일본 리스크’가 영원히 떠안고 가야 할 숙제가 됐다. 결국 초점은 리스크를 얼마나 줄이느냐다. 그것은 앞으로 전개될 싸움의 양상, 그리고 휴전의 내용과 형식이 규정한다. 김상헌식 어투를 빌려 말하자면, 화해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화해를 구하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사건 판결에 대해서도 주화파들은 마뜩잖은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평소 진보적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튀는 판결’로 여기는 경우를 보면 적이 실망스럽다. 복잡한 법리 논쟁은 일단 제쳐놓자. “죄는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되고, 고통은 치유돼야 하고, 손해는 갚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병합 100주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에 나오는 이 문구처럼 평범하면서도 명징하게 사안을 꿰뚫는 말도 없다. ‘개별적 고통’을 ‘전체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억누르지 않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다. 이를 향해 우리는 힘겹게 전진해왔다. 경제와 안보 등을 국가의 신성불가침한 가치로 올려놓고 모든 개별적 고통과 억울함을 외면하는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발상은 졸업할 때도 됐다. 차가운 시멘트의 논리가 합리와 객관의 이름으로 떠도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kjg@hani.co.kr
이슈강제동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