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3년 전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가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꼭 해야 할 말을 하셨어야죠.” 증인들에게 호통을 치며 피해가족들에게 박수를 받았던, 지인인 청문위원에게 말했다. 내가 비슷한 청문회의 청문위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청문회에 섰다. 나는 꼭 해야 할 말을 했는가. 에스케이케미칼, 애경이 수시로 회합을 하고 수사와 재판, 특별법 개정 등에 관한 정보를 취합, 공유하고, 로비 계획을 협의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주심위원이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않고 직접적인 심판대상 기업 및 그 법률대리인들을 수시로 만나는 등 공정거래위원회의 불공정성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리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듣고 느끼는 자리이기도 했다. 에스케이케미칼과 애경산업의 ‘사과’가 있었다. 하지만 사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다 사과인 것은 아니다.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고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책임자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배상 등 회복조치를 취하고, 재발 방지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사과다. 내용 없는 ‘사과’로 피해자들에게 용서와 망각을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들에 대한 또 다른 가해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8년 만에 두 기업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지켜봐야 한다. 옥시레킷벤키저(옥시RB)와 영국 본사인 레킷벤키저는 일찌감치 ‘사과’는 했지만 참사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본사는 모두 책임을 비켜갔다. 세계 모든 기업, 공장에서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일관된 기준을 갖고 있다는 정책과 그 내용은 레킷벤키저의 제품안전정책, 투자자 보고서, 지속가능 보고서 등에 수없이 나온다. 기업의 제품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중지되고 체포영장이 발부된 자를 외국에서 기업 임원직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웬만큼 못된 기업도 감히 못하는 짓이다. 적어도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는 다른 가해기업에 비해 적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범위도 제한적이었고 지금은 가해자 간의 형평을 장황하게 논의할 때가 아니다. 그 어떤 기업도 정부가 나서기 전에, 수사나 형사절차가 진행되기 전에 스스로 참사의 원인과 피해자에게 다가간 기업은 없다.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특별법이 제정될 때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피해 사이에 “상당한 개연성”이 있으면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규정을 두게 된다. 그리고 손해배상책임과 무관하게 기업들의 부담금으로 조성된 구제계정에 의한 지원은 “관련성”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규정됐다. 입증책임, 인과관계 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는 정부 입장에서는 정부 예산과 구상권, 기업 입장에서는 손해배상과 기금 분담금, 피해자 입장에서는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린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법률상 “상당한 개연성”은 시행령상 “상당한 인과관계”로 둔갑했고, 법률상 “관련성”은 시행령상 “의학적 개연성”으로 대체됐다. 표현뿐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이 책임이나 지원의 범위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됐다. 무지에 의한 것이든, 무지막지한 로비에 의한 것이든 잘못된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피해자 지원 과정에서의 많은 문제점들이 얘기됐다. 행정상 편의를 위해 신청을 철회하고 재신청하도록 강권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신청자, 환경부와 기업 간의 소통 부재로 거의 2년 동안 아무런 절차가 진행되지 못한 천식피해자 등등. 사소한 실수, 거짓말, 책임회피가 참사의 원인이 되고 참사 후 피해자들을 두번 세번 죽이는 원인이 된다. 청문회에서 여러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의미 있는 성과였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는 사람들, 특별한 상황에 놓인 보통 사람들. 피해자들과 공감의 폭을 조금은 더 넓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과 조사관들이 서로 좀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도 되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 청문회를 내용적, 실무적으로 준비해온 조사관분들께 감사드린다. 한계가 있다면 한계의 끝까지는 함께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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