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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삼성 재판’에 초대받은 찰스 디킨스 / 안재승

등록 2019-12-16 18:33수정 2019-12-17 11:47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산업혁명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예리하게 들춰냈다. 아동노동 등 열악한 노동 현실과 빈민들의 밑바닥 삶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힘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섰고 사회 개혁을 촉구했다.

디킨스는 10살 때 아버지가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약 공장에서 일했다. 어려서부터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몸으로 겪은 것이다. 이때의 경험이 평생토록 깊은 상처로 남았고 문학적 자산이 됐다고 한다. 장남수 울산대 교수(영문학)는 디킨스의 작품이 세월을 넘어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이유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문제의식의 현재성과 문제를 탐구하고 형상화하는 빼어난 솜씨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광의의 민중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 등이 지금도 소설뿐 아니라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져 사랑받는 이유다.

지난 13일 열린 ‘삼성에버랜드 노조 와해 공작 사건’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인 손동환 부장판사가 디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려운 시절>을 인용했다. <어려운 시절>은 그가 1854년 가상의 공업도시 코크타운을 배경으로 쓴 소설로, 코크타운의 은행가이자 공장주인 바운더비가 런던에서 온 신사 하트하우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도시에서 일하는 일손들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할 것 없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한가지 갖고 있습니다. 바로 황금수저로 자라수프와 사슴고기를 먹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절대 황금수저로 자라수프와 사슴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결코 먹을 수 없단 말입니다.” 노동자들은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손 부장판사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노사업무 총괄책임자였던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 등에게 유죄 판결을 하면서 “21세기에 사는 피고인들이 19세기 소설 속 인물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닌가”라고 질책했다. 삼성은 에버랜드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자 미래전략실이 만든 대응 전략에 따라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조 활동을 방해하고 노조 핵심 인물을 해고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았다. 손 부장판사는 또 “우리 헌법은 근로자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했다.

17일엔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공작 사건’ 선고 공판이 열린다. 강경훈 부사장 외에도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사장), 원기찬 삼성카드 사장, 정금용 삼성물산 사장, 박용기 삼성전자 부사장 등 고위 임원들이 대거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 재판부의 입에 다시 한번 관심이 쏠린다.

안재승 논설위원 jsahn@hani.co.kr

▶ 관련 기사 : 삼성의 ‘조직적 노조 탄압’ 첫 형사처벌…법원 “그룹 차원 범행”

▶ 관련 기사 : 법원 판결로 확인된 삼성의 조직적인 ‘노조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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