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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동물국회’ 관전기 / 장나래

등록 2019-12-29 18:25수정 2019-12-30 09:23

장나래 ㅣ 정치팀 기자

“문희상 역적 XX야”

8개월 만에 ‘동물국회’가 재현됐다. 지난 4월 선거제와 검찰개혁을 위한 법안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 안건)에 오를 때 벌어졌던 몸싸움이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되풀이된 것이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지난 27일 본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들어오자 ‘인간 장벽’을 만들며 거친 몸싸움을 일으키고, 고성에 욕설까지 난무했다. 이은재 한국당 의원은 질서유지권을 발동시키며 다시 들어온 문 의장을 팔꿈치로 때리며 외려 “성희롱하지 말라”고 소리치다 119구급차에 실려 갔다. 아수라장이었다.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고 8개월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한국당이 선택한 전략은 또 ‘육탄 저지’였다.

‘누구든지 국회의 회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회의장이나 그 부근에서 폭력행위 등을 하여서는 안 된다’(국회법 165조)고 명시한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은 2012년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주도해 만들었다. 국회선진화법의 핵심 내용 중 하나인 패스트트랙 역시 새누리당이 동의한 제도다. 그랬던 한국당 의원들이 이번 본회의를 앞두고서는 “국회선진화법을 두려워하지 말자”며 다시 ‘몸싸움’을 결의한 것이다. 자신들이 만든 법을 스스로 부정해버린 웃지 못할 촌극이다.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의 품격도 함께 실종됐다.

더구나 한국당은 현재 소속 의원 59명이 지난 4월 패스트트랙 지정 과정에서 회의 방해와 폭력행위를 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스스로 만든 법에 따라 처벌받을 위기에 빠진 셈인데, 경악스러운 대목은 한국당이 국회선진화법의 처벌 조항을 삭제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일 당 정책위의장에 당선된 김재원 의원은 당시 정견발표 때 “국회선진화법의 형사처벌 조항을 모두 삭제하자는 합의에 이르렀지만 여당이 아직 정리하지 않고 있다. 국회법을 개정함으로써 수사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2~3일짜리 짧은 임시회를 반복하는 ‘깍두기 국회’를 주도한 여당도 국회선진화법 무력화에 책임이 있다. 다수당에 맞서 소수 정당의 권리를 보장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제도는 이번에 그 의미가 무색하게 됐다.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의 속도를 높이려는 고육책이라고 하더라도 국민 눈에 이런 상황이 정상으로 비칠 리 없다. 백혜련 민주당 의원이 자신이 대표 발의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필리버스터 토론자로 나오는 장면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보라 한국당 의원은 이를 두고 “자신이 발의한 법안이 상정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필리버스터에 나서는 해괴하고 웃긴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필리버스터는 국민의 관심을 끄는 데에도 실패했다. 지난 24일 첫 토론자로 나선 주호영 한국당 의원은 기저귀까지 차고 발언대에 섰지만,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성탄 전야부터 성탄절까지 이어진 ‘성탄 필리버스터’는 ‘펭수 달력’만큼도 주목받지 못하고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권에서 사라졌다. 2016년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방청석이 꽉 찬 본회의장에서 12시간33분 동안 마이크를 잡으며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던 것과 비교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필리버스터’라는 정치 용어는 ‘소수 정당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표현으로 통용되기 어려울 수 있다.

20대 국회의 2019년 의정 활동은 이렇게 온갖 몸싸움과 편법의 기록을 남기며 막을 내리게 될 듯하다. 지난주 ‘동물국회’ 한복판에서 거칠게 울리던 “민주주의는 죽었다”라는 구호가 주말 내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여야가 대화와 타협 없이 지금처럼 평행선을 달린다면, 언젠가 “당신들이 민주주의를 죽였다”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w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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