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 ㅣ 제주 출판사 ‘켈파트프레스’ 대표·미술평론가
2월26일 출발 예정이던 리스본행 비행을 이틀 전에 취소했다. 이 글은 리스본으로 향하는 13시간의 비행 중에 쓸 예정이었다.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가는 기차도, 숙소도 모두 상상 속에만 남는 경험이 됐다. 노르웨이에서 넘어와 리스본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의 일정도 덩달아 취소다. 포르투갈은 아직 한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격리조치를 취하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리란 걱정보다는 위험국가에서 온 내가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더 커 여행할 마음이 없어졌다. 위험국가의 국민이든 아니든, 이제 우리 모두는 잠재적 코로나바이러스 보균자 혹은 전파자가 아닌가. 바이러스 보균 확진자의 동선을 속속들이 파악해 보도하고 신상이 공유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내 동선도 검열하게 된다. 여행도 가면 안 될 테고, 사람이 많은 곳에도 가선 안 될 것이며, 남의 영업장에 괜히 들러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이게 된다. 내가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모든 활동이 움츠러든다.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대체로는 집에 머물게 된다. 집 밖을 나서는 마음이 무겁다.
국제선은 취소했지만 서울 일정은 변경이 어려워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의 내 자리를 찾아가면서 이미 착석한 모든 이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 놀랐다. 이렇게 모두가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면 쓰지 않은 이가 더욱 눈길을 끌게 된다. 절박한 심정으로 공항에 오기 전에 수많은 편의점에 들러 마스크를 구한 기억이 스쳤다. 겨우겨우 3500원짜리 마스크를 손에 넣었을 때의 안도감이라니. 지금 내 얼굴에 마스크가 쓰여 있지 않았다면 완전히 벌거벗겨진 기분이었을 거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병에 걸렸다면 걸린 대로, 걸리지 않으면 걸리지 않은 대로 불안한 상황, 우리는 이 질병을 어떻게 봐야 약간의 자유라도 얻을 수 있을까?
“어원학적으로 보자면, 환자는 고통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환자들이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책에 쓴 수전 손택의 문장이다. 질병을 둘러싼 이들의 판단, 즉 인간의 은유가 환자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 말이다. 그 판단을 한 이도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어떤 질병에 걸려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 은유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 이 놀라운 사고과정으로 서로에게 불필요한 굴레를 씌우고 있다는 뜻이 된다. 질병을 질병 자체로 투명하게 보지 않는 데서 질병보다 더한 고통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손택이 1978년에 <은유로서의 질병>을 쓸 때, 작가 본인이 이미 암이라는 질병을 이겨낸 뒤였다. 암을 둘러싼 부정적인 은유와 싸운 본인의 경험이 녹아 들어간 에세이다. 손택이 다시 1989년에 <에이즈와 그 은유>를 쓸 때 뉴욕은 에이즈라는 질병과 싸우고 있었다. 손택 역시 많은 친구를 이 병으로 잃었다. 78년 작에선 본인이 결핵과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 우리가 질병을 얼마나 은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89년엔 에이즈가 가지고 있던 은유에 대해서 해석하며, 다시 그 해석을 반대한다.
질병을 둘러싼 은유들은 어떤 질병에 낙인을 찍는다.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도 낙인을 찍는다. 손택은 우리에게 말했다. “질병은 저주도 아니며 신의 심판도 아니고 곤혹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질병은 치료해야 할 질병일 뿐이다. 그로 인해 사람에게 낙인이 찍혀서도 안 되고 그 낙인으로 고통을 받아서도 안 된다.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는 2015년의 메르스코로나바이러스 마지막 사망자의 이야기를 주력해 들려준다. 끝까지 질병이 아닌 사람이었던 한 명의 의사이자, 아빠이자, 남편이자, 환자였던 이의 이야기를 철저하게 환자의 입장에서 보여준다. 얼마 전에 이 마지막 사망자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한 한 소송에서 이겼고, 보상금을 받게 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람을 질병으로 보는 건 법적으로 금지됐다는 메시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