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ㅣ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다.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 돼 치르는 첫 총선이다. 게다가 ‘준-준-연동형’이기는 해도 전보다는 비례성이 더 높아진 선거제도로 치르는 첫 선거다. 기성 양대 정당만이 아니라 정의당, 녹색당처럼 색깔이 뚜렷한 정당들이 이번만큼은 자기 색깔로 승부하는 다채로운 선거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선거제도 개혁을 망치겠다고 미래통합당이 만든 위성정당의 등록을 중앙선관위가 받아주는 황당한 일이 있더니, 더불어민주당까지 이에 맞불을 놓을 자기편 위성정당이 필요하다며 들썩인다. 급기야는 더불어민주당 바깥에 ‘연합정당’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위성정당을 꾸리려는 흐름이 생기고, 진보정당들도 여기에 들어가야 한다는 협박을 받는다. 꼼수에 꼼수로 맞설 수는 없다며 합류를 거부하는데도 말이다.
진보정당이 자기 당 이름으로, 자기 후보를 내세워 선거에 참여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 행위가 다시 한번, ‘해선 안 될 일’ 취급을 당한다. 제6공화국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선거 때마다 반복돼온 집단행동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양당 카르텔을 깨겠다고 등장한 세력들을 양당 정치에 다시 포획하려는 무시무시한 시험이 진보정당들을 혼란과 분노, 고립감에 빠뜨리고 있다.
실은 진보정당들에도 책임이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진보정당들은 현 여당의 전신 조직들이 주도한 민주대연합에 적극 참여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고 노회찬 의원을 비롯한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이 민주대연합론자들의 엄청난 공격을 받은 뒤에는 이게 아예 불문율이 되어버렸다. 그럴수록 기성 양대 정당 모두와 경쟁하겠다던 진보정당의 본래 색깔은 희미해지고 이른바 리버럴정당 ‘2중대’라는 인식이 퍼져갔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 사태에서 정의당 등이 보여준 모습은 이런 인식을 더욱 굳혀놓았다.
그러나 이제 진보정당들은 자문해야 한다. ‘투명인간들의 정당’이 되겠다는 다짐은 과연 민주대연합 노선과 병존할 수 있는가? 기득권층만을 대변하는 기성 양대 정당에 맞서겠다던 민주노동당 창당 정신은 2010년대 들어 투명인간들의 정당이 되겠다는 포부로 변주되고 발전했다. 주류 정당들을 통해서는 도무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정당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투명인간을 양산하는 양당 카르텔의 한쪽 당사자와 손잡으며 바로 그 투명인간들을 대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정치적 곡예다. 너무 어려운 일이라 현실에서는 분열증이 진보정당을 지배해왔다. 당 행사에서는 투명인간들의 정당이 되겠다고 거듭 맹세하지만, 선거에서는 리버럴정당이 주도하는 민주대연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이게 진보정당의 본모습 아니냐며 이번에도 이를 반복하라고 진보정당들에 다그치는 중이다.
이참에 진보정당들은 과감히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 진정으로 투명인간들의 정당이 될 것인가, 아니면 민주대연합에 묻혀 보이지 않는 투명정당에 머물 것인가? 후자의 선택은 결국 진보정당운동의 포기일 뿐만 아니라 투명인간들을 양산하는 양당 카르텔 정치가 대대손손 이어지게 도와주는 것이다. 지난해 이미 확인했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양분된 정치는 둘 중 어느 쪽에도 마음을 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다. 진보정당들이 연합정당론에 흔들리고 만다면, 똑같은 비극이 이번 총선에서도 재연되고 말 것이다.
진보정당운동의 가장 영광된 순간이었던 2004년 총선을 돌아보자. 멀쩡한 대통령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탄핵 위기에 몰리고 불과 한달 뒤에 선거가 실시됐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사생결단은 지금보다 더 격렬하면 격렬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때 민주노동당이 외친 구호는 “판을 갈자”였다. 양당 기득권 정치, 다 갈아엎자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진보정당운동이 돌아가야 할 원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