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ㅣ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재난과 불행은 위기에 취약한 현실을 넘어 새로운 대안을 고민하고 실현할 동력을 제공한다. 마치 20세기 초 세계를 휩쓴 대공황이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를 보편화시킨 것처럼, 세계경제를 심각한 위기에 빠트린 코로나19가 기본소득에 대한 전지구적 관심과 실험을 촉발하고 있다.
기본소득의 원론적 의미는 국가가 개별 시민에게 조건 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현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현재 논의 중이거나 시행 중인 소액의 재난기본소득이 기본소득 본래의 취지와 다르다는 논쟁은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제도는 대체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지속적인 경제위기나 자동화 등 기술혁신으로 재난에 준하는 고용 환경이 지속될 때 재난기본소득이 결여하고 있는 보편성과 정기성의 원칙이 추가될 수 있는 중요한 저변 확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
기본소득은 주로 언급되는 선별 비용뿐 아니라 복지 제공에서의 선별 오류와 잘못된 추정의 가능성까지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다. 장기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취업준비생과 비정규직, 더 나아가 특수고용직 등 모호한 고용관계하의 노동자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전제로 하는 사회보험은 무용지물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부양의무자 기준을 두는 것도 모든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가진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것이라는, 아름답지만 다소 공허한 판타지를 전제로 한다.
자격 없는 자에게 혜택을 주지 않기 위해 받아야 할 사람에게까지 혜택을 주지 못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몇몇 자격 없는 자가 혜택을 받는다 해도 자격 있는 자가 빠짐없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옳을까. 기본소득은 후자에 속한다.
기본소득은 또한 우리를 생계의 위협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아직 가보지 못한 이 세계의 시민은 의존적이고 노력하지 않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더 혁신하고 도전하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인가. 물론 섣부른 진단을 하긴 어렵다. 기본소득의 수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등 유관 제도의 적절성,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민의식과 같은 여러 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경제의 역동성을 증진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품고 있다. 노동자의 기술변화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고 청년을 공무원시험 준비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창업과 의미 있는 사회적 기획에 더 많이 참여시킬 수 있다. 또한 저임금 노사관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소득이 있는 경우 힘들고 위험한 저임금 일자리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고 이는 조직과 기술혁신을 통해 해당 일자리의 질적 개선을 가능케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선별적 복지 역시 부정수급과 노동의욕의 쇠퇴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기본소득이 과연 정치적으로 가능할까.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층만 아니라면 추가적인 세금 부담보다 더 많은 기본소득을 받게 될 터이지만 당장의 증세에 민감한 시민을 설득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곤궁하지 않다면 더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란 가정 아래 노동자의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저열한 윤리의식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자에게 왜 “무조건적”으로 소득을 지급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히 희망적이다. 불과 수백년 전에는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고 생각했다. 아니, 단지 생각했던 것만은 아니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고 알았던 사람들을 단지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스럽게 처형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자연과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그 태양조차 거대한 은하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