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ㅣ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제21대 총선이 끝났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이 과반을 훨씬 웃도는 의석을 차지했고, 미래통합당과 그 위성정당은 100석 안팎으로 쪼그라들었다. 촛불항쟁 이후 실시된 조기 대선, 지방선거 결과가 총선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번에도 미래통합당 세력이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촛불항쟁의 승리임에도 승리 같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유권자들이 미래통합당 심판 수단으로 선택한 여당이 촛불개혁과 거리가 멀어졌다. 검찰, 사법, 언론 개혁을 내세우지만, 지난해 법무부 장관 임명 논란을 계기로 많은 이들이 이를 지배자들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보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위기로 사회 대전환을 요구받는데도 여당 총선 공약에는 그런 비전이 전혀 없다. 게다가 이번 총선의 엄청난 승리는 위헌과 위법의 산물인 위성정당을 통해 얻은 결과다.
둘째, 촛불광장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국회에 반영되지 못했다. 미래통합당의 위축은 사필귀정이며 여당 과반 의석도 그럼직한 일이다. 그러나 두 당 의석을 합치면 국회에서 고작 10여석이 남는다는 사실은 촛불 이후 한국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여당이 절반을 넘어 더 차지한 30여석은 촛불광장을 채웠던 또 다른 목소리들의 몫이 돼야 맞았다. 그러나 이들은 압살당했다.
짓밟힌 목소리 가운데는 진보정치가 있다. 정의당 의석은 6석 그대로다. 선거법 개정 직후 한껏 부풀었던 기대에 비하면 처참한 결과다. 이런 결과를 낳은 진보정당 자체의 문제를 따지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지만, 또 다른 난제가 있다. 여당 의석이 3분의 2 선을 넘보고 양대 정당의 지배력이 유례없이 강화된 국회에서 6석짜리 진보정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촛불 이후 국회에 기대됐던 모습과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간극, 거기에 수많은 과제들이 있다. 이번 국회는 성격상 제2공화국 국회와 비슷하다. 혁명 과업을 위임받았다는 세력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지만 변화의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럴 때 사회는 허무의 늪에 빠진다. 역사가 돌연 잘못된 방향으로 구부러지는 것은 바로 이런 때다. 60년 전에는 쿠데타였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얼굴로 허무가 거악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 어떻게든 이를 막아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예정된 허무에 맞서기 위해, 진보정당은 지금 허무에 빠질 겨를이 없다.
하지만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거대한 간격은 어찌할 것인가. 정의당만 놓고 보면, 같은 6석이라도 지난 국회와 이번이 전혀 다르다. 20대 국회에서는 양당 독점 체제가 이완됐기에 6석짜리 정당도 법안 심의와 협상에서 존재를 부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21대 국회에서는 그럴 여지가 전혀 없다. 정의당이 오랫동안 적응해온 정치 문법과 작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단 참고할 만한 전례는 하나뿐이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획득하며 처음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이 제시했던 ‘거대한 소수’ 전략이 그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비록 의석은 소수라도 국회 밖 대중운동과 결합해 사회 변화의 큰 목소리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거대한’ ‘소수’였다. 아쉽게도 민주노동당 역시 이 약속에 맞는 실천을 펼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후 진보정당 운동은 리버럴 정당의 하위 파트너가 되는 오랜 방황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16년 전의 그 약속을 되새길 때다. 국회가 촛불광장과 멀어진 만큼, 진보정당은 거리로, 광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의당이 ‘6411번 버스’로 환기하곤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진보정당이 아니면 목소리를 낼 데가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 거기에 의석수보다, 언론의 주목보다 더 강력한 진보정당의 존립 근거가 있다. 회복과 반격의 진지가 있다. 다음 ‘혁명’을 바라는 모두의 출발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