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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간·주력산업’ 지원, 대기업 소원수리가 되지 않으려면

등록 2020-04-24 20:25수정 2020-04-25 13:33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오른쪽)이 지난 23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업종별 대책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한상의 제공/연합뉴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오른쪽)이 지난 23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업종별 대책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한상의 제공/연합뉴스

“보조금 및 대출 지원의 조건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여러 이행 의무들은 전적으로 공정하다. 확실히 우리 업계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더그 파커 아메리칸항공 최고경영자(CEO)·4월15일 <시엔비시>(CNBC) 방송) 미국 정부가 항공산업에 코로나19 긴급 구제금융 250억달러를 지원하면서 붙인 의무 이행조건(△일정한 기간·비율의 고용총량 유지 △임원 고액보수 제한 △배당 및 자사주 매입 금지 △기업 정상화 이후 이익의 국가·사회 공유)에 온전히 순응하겠다는 말이다. 미 항공사들은 담보물로 보유 항공기까지 제공했다.

지난 23일 한국무역협회·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가 낸 합동 건의문은 달랐다. “기업 내부의 귀책사유가 아닌 팬데믹에 의한 불가항력적 상황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만큼 기업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고… 지원 대상 업종과 규모에서 필요한 기업이 소외되지 않도록 탄력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정부가 항공·자동차 등 7대 ‘기간산업안정기금’ 40조원을 발표한 이튿날 재계가 집단적으로 낸 건의문은 표면적으로 ‘자율성·소외’ 같은 건조한 어휘를 선택했지만, 지원 조건·방식이 불만스럽다며 집합행동에 나선 것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지원 조건은 미 항공업계에 부과된 항목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겨놓은 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흡사하다. 고용 유지 기간·비율 같은 원칙과 고통분담 배분 같은 규율을 놓고 정부–재계 사이의 각축 돌입을 예고한 셈이다. 이번 40조원은 ‘기간·주력산업’ 지원이 명분이지만 실상은 개별 재벌 대기업 지원이나 다름없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주축인 각종 산업협회·단체를 앞세워 하루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고 다음날엔 대한상의에 모여 지원방안 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코로나 급습에 쓰러져가는 기업들을 시간을 다퉈가며 일단 살려놓고 봐야 하는 건 분명하다. 폭풍우·천둥이 몰아치는 계절에 “지나고 나면 평온해질 것”이라는 말은 안이하고 쓸모도 없다. 하지만 담보·보증 제공도 없이 수천억원, 수조원 급전을 거의 무이자 특혜로 융통하거나 무상 보조금 성격의 구제금융으로 받는 처지에서 ‘할 말이 많은’ 태도는 자못 고약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건 기업가들 스스로 신봉해온 시장 원리다. 괘씸하게도 “귀책사유·불가항력” 같은 책임을 따지는 용어까지 굳이 앞세워가며 ‘이익 공유’ 조건에 반발한다는 말도 나온다. 우리가 경험했듯 과거 금융위기 때 ‘최후의 보루’로서 정부가 쏟아부은 자금 덕분에 기업들이 회생한 뒤 그 성장의 과실은 경영자·주주가 거의 독점했다.

삶이 망가져 비탄에 빠져든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절박한 아우성과 재계의 ‘코로나 애로사항’ 소원 수리는 구분돼야 한다. 바이러스 창궐 이전에 경쟁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멀쩡하게 영위해왔던 기업이라면 비상경영체제로 몇달은 버틸 여력이 있을 것이다. 시장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보이는 손’으로 불리는 법인들은 거대 자본력과 유능한 고임금 인재들이라는 물적·인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시장 독과점 지위에 있으니 글로벌 경제가 재가동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회복세에 들어설 수도 있다. ‘모든 혼돈이 끝난 뒤 세계는 지금과는 절대 같지 않을 것’이라는 따위 문명사적 담론들이 제출되고 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생산·소비 활동을 지속할 것이다.

재계는 건의문에 “다른 산업과 달리 기간산업은 한번 무너지면 신생 기업에 의한 대체·복구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했다. ‘역동적인 혁신·파괴·창조’라는 시장경제의 독특한 강점을 기업인들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기업 활동에서 위험과 손실은 차라리 일상이다. 기업이 수취하는 대부분의 이윤은 경기변동은 물론 ‘블랙스완’ 출몰 같은 예측하지 못한 온갖 경제적 위험을 무릅쓰는 대가로 획득된다. 이를테면 주식회사의 기원, 곧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거센 풍랑 ‘위험’ 앞에 무역선을 만들 때 여러 사람이 선박 널빤지 몇개씩에 각각 투자한 사실이 말해준다.

공중보건 영역에서 엄습한 경제 충격과 그 파급 경로 및 통화·재정 처방을 다룬 대목은 경제원론 교과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총수요·총공급이 일순간에 멈춰 선 지금, 워낙 화급하다 보니 긴급 투입자금의 규모·조건·대상을 정하는 일이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경제관료들에게 거의 맡겨져 있다. 정부–재계 사이의 각축에 국회와 사회가 함께 개입해 이들을 견제하고, 이 고통스러운 이행의 계곡을 통과한 뒤의 ‘포용적 경제’를 고려한 재정 투입을 구상해야 한다. 기간산업이 국민경제의 등뼈이지만, 기업보다 ‘고용’이 먼저다. 대우·기아·쌍용·한보에서 경험했듯 기업의 간판과 주인이 바뀐다 해도 일자리가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조계완 산업부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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