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넘어질 때마다 노동과 소비의 기회를 잃은 이들의 불만을 체제에 무해한 쪽으로 돌리려는 통치자들은 희생양이 될 집단을 즉시 찾아낸다.
가장 손쉬운 희생양은 바로 외관이나 언어상으로 식별이 가능한 가시적 타자들이다.
대공황 이후인 1930년대에 유럽의 유대인과 집시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를 우리는 다 기억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비유하자면 자전거와 같은 논리로 움직인다. 자전거가 계속 움직여야 쓰러지지 않듯이 자본주의는 유통과 이윤, 그리고 성장으로 버틴다. 소비가 되어야 물건이 팔리고 물건이 나가야 노동자의 임금과 임대료가 지급된다. 임금은 다시 소비로 돌아오고 축적된 임대료는 투자로 돌아온다. 이렇게 이윤의 축적으로 성장을 달성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자전거는 전진한다. 그런데 만약에 생산과 소비, 이윤과 투자의 순환이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즉시 위기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소비가 줄면 생산이 덩달아 줄어든다. 그러면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그에 따라 소비가 더 위축된다. 임대료 소득의 붕괴와 함께 부동산이 폭락하고, 투자가 더 위축되어 일자리 창출은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공황이 오는 것이다.
코로나 위기만이 자본주의라는 자전거를 쓰러뜨린 것은 아니다. 자전거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 나 있었다. 미국 같으면 제조업 노동자들의 (인플레를 고려한) 실질임금은 1970년대부터 사실상 동결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이 오르는 부동산의 구매를 포함한 소비의 상당 부분을 ‘빚’으로 해결해야 했고, ‘빚’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의 기본 체질은 계속 허약해졌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산업사회는 과잉생산에 따른 이윤율 저하와 전면화된 고용 불안으로 인한 소비 위축과 가계 빚 증가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노동자들의 벌이에서 잉여가치를 빼내 이윤을 축적·재투자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는 자기파괴, 즉 공황의 씨앗을 안고 있다. 소비 능력이 떨어지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더 이상 사지 못하게 되면 그들로부터 자본가들이 떼어 간 잉여가치는 생산이 아닌 투기로 흘러가고 투기의 끝은 바로 주식시장의 폭락과 전체적 공황의 도래다.
팬데믹이 없어도 1929년에 장기적 과잉생산과 소비 위축, 그리고 제조업 이윤율 저하와 투자의 투기화로 인해 미국 증시는 폭락하고 대공황이 발발했다. 이번에는 코로나 위기라는 예상외의 변수가 자본주의라는 자전거에 추가적 타격을 가했지만, 이 자전거는 이미 타이어에 구멍이 난 상태였다. 세계 증시가 동시에 폭락하게 된 기본적인 이유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구매력이 감소하고 제조업 이윤율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그만큼 엄청난 자본이 주식 투기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2020년에 어차피 불황이 오리라는 예측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까지 가세해 불황은 공황으로 이어질 셈이다. 자본주의의 자전거는 이미 본격적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자전거가 약 10년에 한번씩 불황으로 삐걱대고, 약 60년에서 80~90년에 한번씩 공황으로 쓰러지게 되어 있는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며, 자본의 주인들이 이득을 보고 있는 이 체제의 결함 때문이다. 그러나 자전거가 넘어질 때마다 노동과 소비의 기회를 잃은 이들의 불만을 체제에 무해한 쪽으로 돌리려는 통치자들은 희생양이 될 집단을 즉시 찾아낸다. 가장 손쉬운 희생양은 바로 외관이나 언어상으로 식별이 가능한 가시적 타자들이다. 대공황 이후인 1930년대에 유럽의 유대인과 집시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를 우리는 다 기억한다. 한데 배외주의 광풍은 당시의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강타했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완바오산 사건’(만보산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1931년 7월2~3일 조선 곳곳에서 발생한 중국인 학살을 기억하는가? 일제 쪽이 제공한 ‘중국인에 의한 만주 조선인 살상’ 관련 허위정보를 그대로 받아쓴 <조선일보>의 오보가 도화선이 되어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조선인 하층 노무자와 무직자들이 경쟁자로 여겨온 중국인들을 죽이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실은 조선에 살았던 중국인들도 조선인 못지않게 공황으로 피해를 보았다. 결국 피해자 중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를 웃으면서 지켜본 것은 그때까지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이간질에 공을 들여온 일제와, 중국 상인들을 경쟁 세력으로 인식한 조선인 자본가들이었다.
오늘날 타자를 향한 화풀이와 차별, 배제는 전세계로 퍼져 있다. 중국인들이 구미권에서 물리적 공격과 언어폭력에 시달리지만, 중국 안에서는 또 흑인들이 ‘보균자’로 잘못 지목되어 길거리로 내쫓긴다. 1931년의 ‘완바오산 사건’과 마찬가지로 자연 발생적인 혐오는 전혀 아니다. 쓰러지는 자전거를 바로 세우는 데에 실패한 트럼프 같은 정객들은 필사적으로 가시적 타자들에게 탓을 돌려 ‘유색 인종’에 대한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백인 집단의 인종주의적 결속에 호소하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구미권 여러 지도자의 ‘중국 책임론’은, 현재 구미권의 상황에서 중국인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인에 대한 공격을 은근히 합리화하고 부추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종주의자들에게는 모든 아시아인이 다 똑같이 보여 중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흔히 폭력과 폭언의 표적이 된다.
한국에서의 현 상황은 구미권과 사뭇 다르다. 코로나 대응이 빠르고 적합했던 만큼 통치자가 굳이 외국에 책임을 전가할 필요도 없다. 또 무역의존율이 80%나 되는 경제인 만큼 배외주의 선동을 쉽게 할 수 있는 사회도 아니다. 그런데도 ‘코로나 대응 모범국’ 한국이라고 해서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애초부터 한국에서도 조선족 동포를 포함한 중국 공민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상당히 강하게 존재했다. 중국, 러시아 등 속칭 ‘못사는 나라’, 거기에다가 안보·군사상 한국의 후견국 격인 미국이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는 나라에서 온 동포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부추기는 것은 잘못된 정치·행정적 판단들이다. 예를 들어 지금 경기도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외국인 가운데 결혼 이민자와 영주권자까지는 재난기본소득 지급 대상에 포함시켜도, 중국 동포와 러시아 귀국 동포들은 사실상 제외시키려 한다. 정치인들은 국난을 겪는 시점에서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지만, ‘국민’이 아닌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배제당하는 억울함뿐이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중국·러시아 동포들도 주민세와 소득세, 지방세 그리고 부가가치세 등을 모두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금을 다 내고도 한푼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차별 피해 집단이 존재하는 사회는 과연 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일까.
타자에 대한 배제는 고장 난 체제를 뜯어고치는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악만 끼친다. 어차피 계속 고장 날 수밖에 없는 이 체제보다 진일보한 세상을 만들고 코로나 위기에서도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타자들에 대한 포용과 협력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