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월세 실거래 신고제는 전월세 상한제와 전월세 계약갱신청구권 등 세입자 주거 안정의 핵심 대책을 실시하기 위한 전제다. <한겨레> 자료사진.
공공기관에서 일하던 그 경제학 박사님은 서울과 일터인 세종시에 집 한채씩을 갖고 계셨다. 그러다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구 중 한 군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셨다. 그 지역구에 전세를 하나 얻고는, 이전 직장이 있던 세종시의 집을 파셨다. 그리고 국회에 등장해 첫 연설을 하셨다.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입을 떼셨다.
그 연설을 언론이 대서특필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학력과 지식이 높으시며 그리하여 이재에까지 밝으신 분들이 너도나도 감동적이라며 칭찬을 한다. ‘임차인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면서. 그런데 칭찬하는 분들 중 서울에 집 갖지 않은 분이 없다.
행정고시 출신의 국회의원께서도 말을 얹으셨다. ‘전세는 어차피 소멸하는 제도다. 월세도 나쁘지 않다. 나도 월세 살고 있다.’ 평생 고용을 보장받았고 국회의원 마치면 두둑한 공무원연금을 받으실 그분은, 당연히 월세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부동산 정책 앞에 말씀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모두가 자아를 잊은 듯, 임대인이 스스로 임차인이라고 선언하고 다주택자가 월세 세입자를 걱정하며 울부짖는다. 정부 정책 탓에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봉건제가 부활하며 청년들이 월세 소작농이 될 것이라고 외치는 유명인사도 등장했다. 다들 이기심을 버리고 시대를 넘어서서 세상을 걱정하는 초인이 되신 것 같지만, 뒤집어보면 모두가 집값 앞에서 정신을 잃으신 것 같기도 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은 길에, 다들 걱정해주신 세입자의 진짜 마음을 알려드리겠다.
세입자는 시세차익으로부터 자유롭다. 단 전월세 금액은 크게 보면 집값과 비슷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집값이 폭등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불안하다. 갑자기 전세금 몇천만원을 올려주는 경험을 하고 나면, ‘이제라도 영혼 끌어오고 빚내서 집을 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꺼번에 오르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어도, 영혼 정도는 지킬 수 있을 테다.
가장 중요한 건 원하는 곳에서 오래 사는 것이다. 나가라는 이야기 듣지 않고 아이 학교 졸업할 때까지라도 편안히 살면 좋겠다.
월세는 나를 피폐하게 만든다. 고정지출이 크게 늘어서다. 수입은 매달 변하고 끊길 위험도 있는데 고정지출이 늘면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노후는 더 문제다. 소득이 끊기고 나서도 월세를 계속 내야 한다면, 그건 재앙이다. 정년까지 매달 일정한 월급을 보장받고 연금을 두둑이 보장받는 공무원이나 교수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누구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고장 난 수도꼭지 하나 고쳐달라고 전화하기도 망설여진다. 다음 전월세금 협상 때 인상할 이유가 될지도 모르니까. 집주인이 바뀌면 갑자기 나가라고 할까 봐, 부동산 중개인이 집 보여달라고 연락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나는 다행히 괜찮은 집주인을 만났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행운을 누리지는 못한다. 그나마 괜찮은 정부나 비영리 기관이 집주인 역할을 한다면, 최고는 아니지만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개인보다도 더 안정적이고, 문제가 생기면 절차에 따라 처리하며, 전월세금을 크게 올리거나 갑자기 나가라고 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집주인이다.
이런 모든 면에서 경기도가 내놓은 기본주택 정책은 옳다. 장기간 다양한 형태로 빌려 쓸 수 있는, 모든 계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이다. 민간이 나서서 영리를 취하지 않는 사회주택을 많이 공급해도 좋겠다. 국회가 통과시킨 임대차 3법도 옳은 방향이다. 일단 4년은 안심할 수 있고, 인상률도 5%로 잡아준다. 물론 1%에도 못 미치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이조차도 높다.
기본소득제 도입도 기초연금 인상도 옳다. 고정수입이 있다면 꼭 그만큼 고정지출의 부담이 가벼워진다.
한국의 가구 자산 중 75%인 6600조원이 부동산에 잠겨 있다. 미국의 30%대, 일본의 40%대보다 훨씬 높다. 그 돈을 벤처기업에 투자했다면 실리콘밸리가 부럽지 않은 나라가 됐을 것이다. 그 돈을 소비했다면 생활은 윤택해지고 동네 자영업의 형편은 나아졌을 것이다. 그 돈을 복지에 투자했다면 노인자살률 1위와 합계출산율 0명대라는 멍에를 벗었을 것이다. 학교에 투자했다면 아이들이 좀더 즐겁고 당당하게 공부하고 있을지 모르고, 환경에 투자했다면 기후변화를 막는 선도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비싼 아파트가 아니라 좋은 세상이다.
이원재 ㅣ LAB2050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