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ㅣ 도쿄 특파원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거리에 있는 사이타마현 한적한 마을에 ‘마루키 미술관’이 있다. <한겨레>에 칼럼을 쓰고 있는 서경식 교수(도쿄경제대)의 글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가봐야지 마음만 먹고 있다가 2018년 겨울 그곳에 갔다. 미술관에 발을 내딛는 순간 75년 전 참혹했던 히로시마와 마주해야 했다. 1945년 8월6일 월요일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엔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아비규환이 그곳에서 벌어졌고, 14만여명이 희생됐다. 당시 히로시마 주민이 약 35만명이었다고 하니, 절반 가까이 사라진 셈이다. 아침을 먹다가, 출근하던 길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던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 파괴됐다.
마루키 부부는 화가다. 남편 마루키 이리(1901~1995)의 고향은 히로시마다. 원폭이 투하된 사흘 뒤 도쿄에 있던 이리는 부모, 형제가 있던 히로시마로 달려갔다. 아내 마루키 도시(1912~2000)도 일주일 뒤 합류한다. 부부는 폐허가 된 히로시마에서 구호활동을 하며 참상을 보고, 듣고, 기록했다. 5년 뒤인 1950년 <원폭도>의 첫 작품인 ‘유령’이 발표됐다. 이 시리즈는 32년 동안 계속 이어졌고 15점의 그림이 그려졌다. 가로 7.2m, 세로 1.8m의 거대한 그림이 파노라마처럼 연결돼 있다. 마치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 한가운데 있는 듯했다. 애써 억눌렀던 감정이 14번째 그림인 ‘까마귀’ 앞에서 무너졌다. 하얀 저고리를 보는 순간, 까마귀떼 아래 쌓여 있는 주검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 아래 이런 말도 붙어 있었다. “맨 나중까지 남은 주검은 조선인이라고 하더군. 까마귀는 하늘에서 날아왔다. 주검마저 차별받는 조선인….”
마루키 부부가 그린 ‘까마귀’. 마루키 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그들은 왜 거기에 있었을까? 각자의 사연이 있겠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엔 미쓰비시 등 군수공장이 있었고,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이 많았다. 조선인 피폭자 규모는 약 7만명, 이 중 4만명이 숨졌다고 한다. 마루키 부부는 전쟁의 끔찍함뿐만 아니라 일본이 가해자의 위치였다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원폭도> 15점 이후에도 1937년 중일전쟁 때 일본군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난징대학살’ 등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미술관 앞에는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통한의 비’도 세워져 있다.
일본에선 마루키 부부처럼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소수다. 단적인 예로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해 일본 국민의 70%는 “납득할 수 없다”고 답했다. “납득할 수 있다”는 2%에 그쳤다. 이런 여론은 일본 정부를 반성하지 않게 만든다.
도쿄특파원 첫 칼럼에서 마루키 부부의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의 한-일 관계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다. 지난 4월 말 도쿄특파원으로 결정됐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일본 정부가 입국을 제한하면서 3개월 넘게 일본에 가지 못하고 있다. 일본 코로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지만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마루키 미술관은 후원금과 입장료로 유지되는데, 코로나19로 재정이 나빠지면서 올해 운영 자체가 어려운 처지에 내몰렸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모금이 시작됐고 4452명이 참여해 5811만엔(6억4천여만원)이 모였다. 마루키 미술관의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힘이다.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관계 탓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뒷전으로 밀리지 않도록 일본에 가게 되면 제2, 제3의 마루키를 찾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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