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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상한 이분법 / 조문영

등록 2020-08-26 16:57수정 2020-08-27 02:41

조문영 ㅣ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잠시 주춤했던 코로나가 다시 확산하는 모양새다. 다음 학기에 부분적이나마 대면 수업을 시행하고자 했던 대학들도 서둘러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대학에 “첫발을 내딛다” 같은 진부한 표현조차 쓸 수 없게 된 신입생들은 고등학교 시절처럼 ‘인강’(인터넷 강의)을 듣듯 수업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다. 하지만 물리적인 만남을 기준으로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구분하면서 양자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어딘가 찜찜하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거쳐 만남을 성사시켰고, 면과 면의 마주침이란 언제 어디서든 가능성과 취약성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대면 수업은 분명 우리의 감각을 깨우면서 접촉면을 늘려준다. 강의실로 걸어가는 동안 내가 대면하게 되는 생명과 물질은 차고 넘친다. 학생과 교수뿐 아니라, 길을 쓸고 잡초를 뽑고 책상을 닦는 수많은 노동자가 있어야 대학이 굴러간다는 이치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지난봄에 내가 있는 대학에서 부당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 청소노동자들은 인적이 끊긴 캠퍼스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였다. 그나마 연구실에서 비대면 수업을 진행한 덕분에 확성기로 울려 퍼진 청소노동자의 외침이 노트북 스피커를 거쳐 학생들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대면 수업을 못 한다고 “캠퍼스의 낭만” 운운하면서 있지도 않은 경험에 노스탤지어를 부추기는 목소리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입학과 동시에 취직 준비에 돌입하는 학생들이 제법 많아졌다. 이들에게 ‘슬기로운 대학생활’이란 대면 접촉을 늘린다기보다 최적화시켜 내는 것이다. 시간을 아끼고 효율성을 높인다고 카톡 단톡방에서 조별 모임을 진행하는 경우는 코로나 이전에도 잦았다. 그뿐인가. 자고 나면 성범죄 사건이 갱신되는 사회다 보니 동기라며 마음을 터놓기도 쉽지 않다. 타자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보다 어떤 식으로 ‘안전’ 거리를 확보할지 고민하는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거꾸로 비대면 수업이 복수의 세계들과의 접촉면을 늘릴 가능성도 생각해봄 직하다. 원격교육에 인공지능 통역 기술이 결합하면 시차가 엇비슷한 아시아에서 각국의 대학생들이 수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전 지구적인 현안에 중지를 맞대는 풍경도 그려볼 수 있다. 서구에 정박해 있던 글로벌 지식 공론장이 경도를 이동하면 더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비행기를 왕복하며 지구의 수명을 줄이지 않고도 다양한 지역의 학생, 주민, 활동가, 연구자가 토착 지식을 공유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와 세계를 돌보는 기술을 발전시킬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온라인 수업을 영토화, 자본화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추세다. 수업이 복제나 판매가 가능한 상품이 되면서 만성적 재정 위기에 시달려온 대학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대학이 플랫폼이 되어 국내외 양질의 강의를 사고파는 매개자가 된다면 지금처럼 많은 교수와 학습 공간이 필요할까? 개악된 강사법에 이어 원격교육이라는 쓰나미는 인력 감축을 ‘혁신’으로 포장하고, 신진연구자들이 학생들은커녕 제 삶과 대면할 자존감마저 뭉갤 수 있다. 인터넷 연결에서 컴퓨터, 독립된 공간까지, ‘자기만의 방’을 온전히 갖지 못한 학생들 역시 온라인 수업에서 소외를 경험한다. 수업 내내 비디오를 끈 채 자진해서 소외를 택한 학생들도 제법 많다. 소셜미디어에서 신상털기가 횡행하다 보니 온라인 화면에 뜬 제 얼굴을 누군가 캡처라도 할까 두려움이 앞선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모든 수업은 결국 현실의 위태로움과 대면한다. 지체장애인 학생의 부모가 비대면 수업 결정에 안도할 때, 우리는 캠퍼스와 강의실에서조차 시선의 압박에 지친 장애인의 현실과 대면한다. 학생들이 대면 수업이든 비대면 수업이든 자발적 거리두기를 시행할 때, 우리는 성범죄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로 공포와 자기방어가 일상화된 현실과 대면한다. 대학이 코로나를 계기로 비대면 수업을 전면 확대할 때, 우리는 먼 곳의 세계를 만나 들뜬 사이 지척의 동료 연구자가 사라질 위험과 대면한다.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이라는 이상한 이분법에 갇혀 철 지난 애도와 성급한 혁신론 사이에서 시소 타기보다, 우리가 대면해온 여러 폭력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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