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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코즈모폴리턴] ‘음모론’이 자라는 자리 / 이정애

등록 2020-09-03 17:43수정 2020-09-04 12:50

이정애 ㅣ 국제뉴스팀장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드 메인차트 ‘핫 100’을 차지한 날, 인터넷에서 이상한 댓글을 발견했다. ‘일루미나티 작품이지, 유색인종 어림도 없음.’ 일루미나티는 전세계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음모론’ 속 막후 비밀 결사조직이다. 방탄소년단이 ‘피 땀 눈물’(영혼)을 판 대가로, 일루미나티가 이들을 세계적 스타로 띄워주고 있다는 얘기였다.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에 제기된 사탄숭배 논란을 떠올리며, 이 정도 음모론이야 열성적 팬덤의 부산물이지 웃어넘겼다.

인터넷에서나 유통될 법한 이런 음모론이 연일 미국 대통령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딥스테이트(막후 권력집단)가 대선을 의식해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지연시키고 있다” “일부 부자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인종차별 시위에 돈을 댄다” 등등.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쏟아내는 이런 궤변들, 특히 ‘딥스테이트’란 말은 극우 음모론자 ‘큐어넌’(QAnon)과 그 추종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다. 큐어넌 등은 ‘사탄을 숭배하고 소아성애를 일삼는 도당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미국의 정치·경제·문화계 거물 엘리트들이 바로 그 도당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 서사 속에서 트럼프는 ‘도당의 숨겨진 실체를 벗겨내 그들을 단죄하고 미국의 위대함을 복원할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런 황당 주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트럼프는 큐어넌 관련 글에 연신 ‘좋아요’를 누르고 이들의 글을 퍼나르고 있다.

‘미국 대통령 수준 참 형편없네’ 비웃고 말 일이 아니다. 비주류 게시판 웅얼거림에 불과했던 이런 음모론이 코로나19 봉쇄 조처 이후 트위터나 페이스북, 유튜브 등 대중적 소셜 미디어로 번져 현실 속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골방 속 음모론자들은 급기야 화난 얼굴을 드러내고 광장에 모여들고 있다. 독일·스페인·브라질 등에서 열린 극우·마스크 반대 시위에선 큐어넌 상징이 새겨진 깃발까지 등장했다. ‘교회를 문 닫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바이러스를 뿌렸다’고 주장하는 국내 일부 극우 기독교 시위대에서도 감지되는 비슷한 이 기운. “큐어넌이 국제화하면서 전세계에서 반정부 음모 움직임을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 보고서도 나왔다. 심지어 미국에선 큐어넌의 음모론을 앞세운 마저리 테일러가 조지아주 공화당 연방 하원의원 후보로 주류 정치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음모론이 실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자, 각국 정부들은 부랴부랴 팩트체크 강화, 가짜뉴스 유포자에 대한 처벌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하지만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골라 보는 게 인간 심리(확증편향)라지 않나. 음모론에 솔깃한 사람들 눈엔 팩트체크를 한 ‘체커’가 거짓말쟁이로 보일 테고, 삭제된 게시물은 다른 계정, 다른 게시판을 통해 다시금 유포될 수 있다. 음모론이 자라는 토양 자체를 갈아엎지 않고선 확산의 고리를 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주목할 건 ‘세상이 더 살기 좋아졌다’는 객관적인 지표들과는 달리 ‘내 삶은 나날이 퍽퍽해지고 있다’는 아우성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지표와 현실의 간극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란 절망감에 불을 붙이고 있다. 소수의 권력집단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큐어넌의 세계관은 어차피 세상은 ‘노오력’만으로 바꿀 수 없다는 깨달음, 막후 권력집단을 물리치면 새 세상이 열릴 것이란 희망을 주며 몸집을 불리고 있다. 소위 이 사회 엘리트라 불리는 이들이 분노한 사람들 눈에 세상을 망치는 기득권 집단으로 비치고 있다는 점을 수긍·반성할 때, 음모론이 설 자리도 비로소 줄어들 수 있게 될 것이다.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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