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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룻밤에 비핵화란 불가능하다” 다나카의 ‘외로운 외침’

등록 2020-09-22 16:55수정 2020-09-23 02:38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06
다나카 히토시 일본총합연구소 국제전략연구소 이사장이 2019년 11월20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 ‘미-중 전략 경쟁과 동아시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기회와 도전’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부산/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다나카 히토시 일본총합연구소 국제전략연구소 이사장이 2019년 11월20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 ‘미-중 전략 경쟁과 동아시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기회와 도전’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부산/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뭐가 필요할까. 북한이 비핵화를 하는 데 (일본이 나름의 방식으로) 관여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북한이 하루 만에 비핵화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북한의 핵을 (단번에 없애진 못해도) 줄여나가는 게 일본의 이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모여든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파안대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수백번 연습했을 ‘작심 발언’을 입에 담았다. 2018년 6월12일 오전 9시16분(현지시각). ‘공상과학영화 같은’ 세기의 회담이 진행된 싱가포르 카펠라호텔 회의실이었다. 김 위원장은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우기도 했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며 복잡한 심사를 꾹꾹 눌러 담은 ‘모두발언’을 마쳤다. 순차 통역으로 전달된 김 위원장의 얘기를 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건 사실”(That’s true!)이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로부터 4시간 뒤 역사적인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공동성명문이 공개됐다. 이 문서를 받아 든 일본은 경악하고 말았다. 공동성명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이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했다”는 문구가 들어 있긴 했지만, 비핵화의 시기·방법 등 ‘구체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고집해왔던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란 표현도 명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은 김 위원장에게 ‘새로운 관계 수립’과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약속한다는 커다란 선물을 안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회담 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한-미 연합훈련엔 “엄청난 돈이 든다”는 이유로 협상이 진행되는 훈련(war game)을 중단하겠다는 ‘깜짝 선언’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회담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김정은 위원장의 의지를 다시 한번 문서 형태로 확인했다. 북한을 둘러싼 여러 현안의 포괄적 해결을 향해 한 발 나아간 것”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마음속에 솟구치는 불만을 최대한 억누른 외교적 수사였다.

일본 내 북한 전문가들은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을 현실화시킨 다나카 히토시 일본총합연구소 국제전략연구소 이사장은 <아사히신문> 기고에서 “북한의 핵 폐기를 향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합의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합의 내용은 분명히 기대를 벗어난 것이었다.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적었다. 일본 내 한반도 연구 1인자인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도 “(공동성명의) 논리 구성이 종래 북한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먼저 비핵화를 달성하는 게 아니라, 북-미 상호간 신뢰 조성을 통해 비핵화를 촉진해간다는 점이 그렇다. 북한 쪽은 벌써 (북-미가) ‘단계적 비핵화에 합의했다’고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문서에 서명한 경위는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과 마키노 요시히로 <아사히신문> 전 서울특파원의 책 <김정은과 트럼프> 등에서 대강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북-미는 회담이 결정된 5월 말부터 회담 직전까지 합의문안 작성을 위한 ‘집중 협의’를 이어갔다. 이 실무회담을 이끌었던 성 김 주필리핀 대사는 애초 성명문에 CVID와 2020년까지(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로 비핵화의 기한을 명기하려 했다. 하지만 북한의 실무협상 대표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방어는 철통같았다. 최 부상은 처음엔 ‘비핵화’란 용어의 사용조차 강하게 거부했다.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고, 북-미 간에 신뢰관계가 생겨야만 비핵화를 하겠다는 주장을 꺾지 않은 것이다. 북한이 너무 체제보장에만 집중한 탓에 때때로 미국의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있었다. 최선희는 “공동성명에 비핵화를 언급하는 것은 괜찮다”는 선까지는 양보했지만, CVID는 결사반대했다. 불안해진 아베 총리는 싱가포르 회담 직전인 6월7일 정상회담에서 “CVID를 반드시 명기해야 한다”고 되풀이해 강조했지만, 트럼프는 CVID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1일 싱가포르에 도착한 트럼프에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교착상태에 빠진 실무협상의 현황을 소개했다. 이에 대한 트럼프의 반응은 이 회담은 “홍보행사”이기에 “실질적 내용 없는 코뮈니케(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에서 승리를 선언한 뒤 도시를 떠나자”는 것이었다. 막판까지 이어진 실무협상의 쟁점은 ‘종전선언’을 대가로 북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였다. ‘강경파’ 볼턴의 입장은 “분명한 대가를 얻어내기 전까지 종전선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담 당일인 12일 새벽 1시 매슈 포틴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이 볼턴을 깨워 협상이 여전히 교착상태임을 전했다. 종전선언과 그 대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공동성명은 ‘간소한 성명’(short statement)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는 12일 오전 예상외로 종전선언을 언급하지 않는 짧은 문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밝힌 것만으로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지와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약속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확대회담에서 트럼프에게 “북한의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 핵 버튼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농담을 건넸다. 마치 공인된 핵보유국의 정상 같은 태도였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 전 보좌관 등이 반대했던) ‘행동 대 행동’의 접근에 합의해줘 기쁘다”며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가 다음 차례가 될지” 물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행동 대 행동’의 접근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김 위원장이 이 시점에서 트럼프가 자신에게 완전히 설득됐다고 ‘착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의 논리에 따르자면, 1차 회담에서 ‘한-미 훈련 중지’란 성과를 얻었으니 2차 회담의 목표는 유엔 제재의 해제가 되어야 할 터였다. 북은 실제 2·28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를 대가로 2016년 이후 유엔이 부과한 제재 해제를 요구하게 된다. 2·28 하노이의 파국의 원인은 결국 이 ‘인식의 불일치’였다.

일본 보수의 정서를 대변하는 월간지 <분게이슌주>(문예춘추)는 6·12 합의 공개 직후 나온 2018년 8월호에 사토 마사루 전 외무성 주임 분석관과 다나카 이사장의 기고를 나란히 실었다. 사토는 이 글에서 “이 게임의 승자는 김정은”이라며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 제거하면 되는 미국과 중단거리 미사일의 표적이 되는 한·일의 사정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즉 아베 총리가 “미-일이 100% 함께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6·12 합의를 통해 이해가 달라졌다는 인식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역시 대미 의존에서 벗어나 북한과 독자 대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게다가 일본은 아베 총리가 ‘국정 최우선 과제’라 말해온 ‘납치 문제’라는 난제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어진 기고문에서 다나카는 북-미 합의가 “기대를 벗어난 것”이라고 아쉬워하면서도 “합의의 방향성은 올바르다”고 잘라 말했다. 비핵화를 위해 북-미가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추진했던 2002년 9월 북-일 평양선언의 기본 생각과 일치한다는 견해였다. 한때 일본 외무성 내 ‘최고 전략가’라 불렸던 다나카는 “나는 현재 상황이 정말 싫다. 미국은 물론 일본의 소중한 동맹이고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에 있어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정말 많다. 일·한을 무시하고 한반도의 여러 사안을 미국의 논리로만 결정하는 것을 단호히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고문이 일반에 공개될 무렵인 7월3일 다나카는 일본기자클럽 강연에 나섰다. 강연 첫머리에 그는 “이곳 회견이 열번째”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담아” 일본 정부를 향해 ‘압박’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북-일이 도쿄와 평양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북 정상회담 결과 비핵화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폼페이오가 북한에 가면 수일 내에 로드맵(비핵화 일정표)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합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과거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 거라 봅니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할까. 북한이 비핵화를 하는 데 (일본이 나름의 방식으로) 관여해야 합니다. 북한이 하루 만에 비핵화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북한의 핵을 (단번에 없애진 못해도) 줄여나가는 게 일본의 이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나카의 외침에 총리관저에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일본에서도 북-일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7화에선 실패로 끝난 아베 총리의 대북 접근에 대해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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