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16
![북-미 실무협상의 북쪽 협상 대표인 김명길(가운데) 외무성 순회대사가 2019년 10월5일(현지시각) 저녁 6시30분께 스웨덴 스톡홀름 북한대사관 앞에서 성명을 통해 “협상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렬됐다”고 말했다. 스톡홀름/연합뉴스 북-미 실무협상의 북쪽 협상 대표인 김명길(가운데) 외무성 순회대사가 2019년 10월5일(현지시각) 저녁 6시30분께 스웨덴 스톡홀름 북한대사관 앞에서 성명을 통해 “협상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렬됐다”고 말했다. 스톡홀름/연합뉴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553/imgdb/original/2021/0209/20210209501791.jpg)
북-미 실무협상의 북쪽 협상 대표인 김명길(가운데) 외무성 순회대사가 2019년 10월5일(현지시각) 저녁 6시30분께 스웨덴 스톡홀름 북한대사관 앞에서 성명을 통해 “협상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렬됐다”고 말했다. 스톡홀름/연합뉴스
‘하노이 결렬’로 남북 대화는 중단 상태였고, 6월30일 판문점 ‘깜짝 회담’으로 북-미 간 실무회담이 재개된다고 했지만, 성공 가능성은 극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사면초가의 불리한 전장에서 전 병력에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면, 이후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춘추관 2층 브리핑장 연단에 올라선 것은 2019년 8월22일 오후 6시20분이었다. 김 차장은 “일본 정부가 8월2일 화이트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함으로써 양국 간 안보협력 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민감한 군사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국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유지’ 혹은 ‘조건부 유지’ 할 것이란 전망을 깨고 ‘종료’란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어진 백브리핑에서 청와대 당국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가 오후 3시에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연장 여부를 심도 깊게 논의했고 종료를 결정했다. 이어 청와대 여민1관 3층 대통령 집무실 옆 소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대통령께 결정을 보고했다. 약 1시간 동안 다시 한번 토론했고,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고 밝혔다. 이 결정은 2019년 2월 말 ‘하노이 결렬’로 묘하게 꼬이고 만 동아시아 안보 정세에 너무나 복잡한 파문을 몰고 왔다. 당사국인 일본은 강한 놀람과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그날 밤 9시30분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항의한 뒤, 밤 10시6분 외무성 중앙 현관 로비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고노 외상은 “현재 지역의 안보 환경을 완전히 잘못 본 대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에 대해 단호히 항의하려 한다”고 말했다. 미국 역시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2일 캐나다 외교장관과의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나는 오늘 아침 내 한국 카운터파트(강경화 외교부 장관)와 얘기했다. 우리는 정보 공유 협정에 대해 한국인들이 내린 결정에 대해 실망했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도 같은 날 두차례 성명을 통해 “강한 우려와 실망을 표명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의 주요 동맹에 ‘실망했다’는 감정을 드러낸 것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2013년 12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처음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국가협력의 실시나 종료는 국가의 권리”라며 한국을 두둔했다. 미국의 “실망했다”는 반응에 당황한 김현종 국가안보실 제2차장은 23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지소미아 문제 검토 과정에서 미국과 수시로 소통”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김 차장이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 게 아니냐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부상에 맞서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한-일 역사 갈등을 해결(12·28 합의)해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을 강화해나간다는 것은 2010년 중반 이후 미국이 일관되게 추진해온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소미아 이탈은 미국이 그어놓은 ‘레드라인’을 넘는 일종의 일탈 행위였다. 일본을 꺾기 위해 이런 초강수를 두려면, 남북 소통이 원활하고, 북-미 핵협상이 꾸준한 성과를 올리는 ‘유리한 시점’을 골랐어야 했다. 그랬다면 일본 역시 7월 초와 같은 ‘비열한 보복’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 결렬’로 남북 대화는 중단 상태였고, 6월30일 판문점 ‘깜짝 회담’으로 북-미 간 실무회담이 재개된다고 했지만, 성공 가능성은 극히 불투명했다. 사면초가의 불리한 전장에서 전 병력에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면, 이후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무렵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에 봉착해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전시작전통제권의 임기 내 전환’을 마무리하려면, 국방비를 대폭 늘리고, 한-미 연합군사연습을 실시해야 했다. 하지만 북은 하노이 실패로 ‘제재 해제’ 대신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하면서 F-35 등 신형 무기 도입과 한-미 연합군사연습 등에 날 선 반응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에 대한 북의 최후통첩이 나온 것은 7월26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권언’을 통해서였다. 김 위원장은 이날 신형전술유도무기 위력시위 사격을 참관한 뒤 “남조선 당국자가 사태발전 전망의 위험성을 제때에 깨닫고 최신 무기 반입이나 군사연습과 같은 자멸적 행위를 중단하고 하루빨리 지난해 4월, 9월과 같은 바른 자세를 되찾기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저서 <격노>에서 “실망한 친구 혹은 연인”의 편지 같았다고 묘사한 열흘 뒤 ‘친서’(8월5일치)에서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내 믿음은 실무적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도발적 훈련이 취소되거나 연기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남부에서 이뤄지는 군사훈련은 누구를 향한 것이냐. 그들은 누구를 봉쇄하려 하고, 누구를 쓰러뜨리고 공격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는지 “남조선의 군대는 내 상대가 안 된다”는 호언장담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소미아 종료라는 초강수를 둔 정부는 미국과 국내 보수층의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국방력 강화’를 강조해야 했다. 김현종 제2차장은 지소미아 종료 배경을 설명하는 23일 회견에서 “정부는 앞으로 국방예산 증액, 군 정찰위성 등 전략자산 확충을 통해 안보 역량 강화를 적극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29일 국무회의에서 일본에 “정직해야 한다”는 질타를 쏟아낸 뒤, “강한 나라의 기반인 자주국방과 외교 역량 강화”를 위해 “2020년 국방예산은 올해 대비 7.4% 늘어나 사상 최초로 50조원”을 책정했다고 밝혔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2020년 6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토론회에서 “우리 정부는 2019년 8월 국면에서 한-일 대전을 중심으로 한 지소미아 탈퇴를 이슈의 중심으로 삼고 남북 관계를 후순위에 두었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실로 ‘뼈아픈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지소미아 종료에 대한 북의 반응은 미·일과 달리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뤄졌다. 24일 함경남도 선덕에서 동해상으로 ‘최강의 우리 식 초대형 방사포’를 시험발사한 것이다. 이 광경을 현장에서 지도·감독한 김 위원장은 “적대 세력들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과 압박 공세를 단호히 제압분쇄할 우리 식의 전략·전술 무기 개발을 계속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방위성은 이날 발사 소식을 한국 합동참모본부보다 26분 빠른 아침 7시10분에 발표했다. 익명의 외무성 간부는 25일치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일본은 미국과 연대하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일본의 (정보 수집) 능력이 높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한국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격한 주먹다짐을 벌인 한-일은 장기간 냉각기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선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등 지한파 지식인들이 7월25일 ‘한국이 적인가’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분위기 전환에 나섰지만, 사회 전체의 혐한 분위기를 되돌리지 못했다. 유일한 반전 카드는 곧 북-미 실무협상이 재개된다는 소식이었다. 8월 말까지 폼페이오 장관을 상대로 거친 말을 쏟아내던 북한은 9월9일 돌연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담화를 통해 “9월 하순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실무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이에 호응하듯 트럼프 대통령은 10일 트위터를 통해 북-미 대화의 큰 걸림돌이었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경질했다. 또 18일엔 북한이 격하게 반감을 드러내온 ‘선 비핵화’를 뼈대로 한 리비아식 해법을 비판했다. 정세 변화를 감지한 문 대통령은 9월16일 수석·보좌관회의 머리발언에서 “곧 북-미 실무대화가 재개될 것이며, 남·북·미 정상 간의 변함없는 신뢰와 평화의 의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진전시키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9월 말 한국 정상으로선 처음으로 3년 연속 유엔 총회에 참석했다. 23일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24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 나선 문 대통령은 “(북-미) 두 정상이 한 걸음 더 큰 걸음을 옮겨주기를 바란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모두가 목을 빼고 기다리던 북-미 실무협상 일정이 공개된 것은 10월1일 최선희 제1부상의 담화를 통해서였다. 10월4일 예비접촉, 5일 실무협상이 예고됐다. 그에 앞서 북은 ‘협상력 강화’를 노렸는지 2일 동해 원산만 수역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북극성-3호를 발사했다. 최대 비행고도는 910㎞, 거리는 약 450㎞였다. 당황한 아베 총리는 아침 8시57분 카메라 앞에 나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라고 강력히 항의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레드라인’을 넘어선 북한의 도발에도 침묵을 지켰다. 5일 스웨덴의 ‘빌라 엘비크 스트란드’ 리조트에서 열린 8개월 만의 북-미 실무협상은 오전 2시간, 오후 4시간 만에 끝났다. 오후 6시30분 협상을 마치고 주스웨덴 북한대사관으로 돌아온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5분 뒤 30여명의 취재진 앞으로 돌아와 준비된 성명을 읽었다. “미국은 그동안 유연한 접근, 새로운 방법, 창발적인 해결책을 시사하며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하였으나 아무것도 들고나오지 않았으며 우리를 크게 실망시키고 협상 의욕을 떨어뜨렸습니다.” 협상이 허무하게 결렬된 것이었다. 마지막 반전 카드가 무산됐으니, 한국은 이제 ‘조직적 퇴각’을 준비해야 했다. ※17회에선 정부의 지소미아 연장 번복 결정에 대해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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