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18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2월24일 오후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 만남이 한-일 정상이 직접 얼굴을 마주한 마지막 자리였다. 청두/청와대사진기자단
2017년 4월 도쿄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한 뒤 그해 10월 펴낸 책 <아베는 누구인가>의 서문에서 지난 한-일 갈등은 “앞으로 닥칠 ‘거대한 불화’의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예측대로 한-일은 불화했고, 동아시아의 미래를 건 처절한 2018~19년 외교전에서 한국은 꺾였다. 이 복잡하게 얽힌 불신과 증오의 늪에서 극적인 ‘화해의 계기’를 찾아내긴 불가능하다.청와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철회한다고 발표한 다음날인 2019년 11월23일 강경화 외교장관은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 회의가 열린 일본 나고야에서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 얼굴을 마주했다. 한국의 ‘큰 양보’가 이뤄진 마당에 일본도 더 이상 정상회담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이날 오후 3시부터 35분간 이뤄진 회담에서 양국은 “12월 개최가 추진되고 있는 한-일-중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조율해나가기로” 합의했다. 지소미아 종료 철회 결정은 한국에 큰 ‘치욕감’을 안겼다. 청와대와 그 주변의 전문가들은 “일본이 (애초 합의와 달리) 왜곡 발표를 했다. 그에 대해 미안하다는 뜻을 전해 왔다”, “일본이 한달 안에 수출제한 조처를 풀지 않으면 지소미아를 종료하면 된다”, “일본이 자꾸 그런 식으로 하면, 한국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모른다”(try me) 등의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모두 부질없는 소리들이었다. 예정대로 한달 뒤인 12월24일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이 개최된 중국 청두 샹그릴라 호텔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아베 신조 총리가 회담장에 먼저 도착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문재인 대통령을 기다렸다. 두 정상은 가볍게 미소 짓고 악수한 뒤 착석했다. 아베 총리는 “일·한 양국은 서로에게 중요한 이웃이고, 북한을 비롯한 안전보장에 관한 문제에 있어 일-한, 일-한-미의 연대는 극히 중요하다. 나는 중요한 일-한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 솔직한 의견 교환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현재 양국 외교 당국과 수출관리 당국 간에 현안 해결을 위한 협의가 진행 중이다. 양국이 머리를 맞대어 지혜로운 해결 방안을 조속히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두 나라가)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비롯한 협력을 이어나가고, 동북아 평화와 번영에도 함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은 7월1일 수출규제 강화 조처를 결행하며 명분으로 내세운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2020년 3월18일 대외무역법을 개정하는 등 적극 대응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조처 철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의 공식 설명과 달리 지난 보복 조처가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대항 조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6월29일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 분쟁해결 절차의 최종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Appellate Body)는 작동을 위한 최소 인원인 3명을 채우지 못해 기능이 정지된 상태다. 언제쯤 최종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정부 역시 일본이 수용 가능한 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일 관계에 뜻밖의 전기가 찾아온다. 아베 총리가 8월28일 지병인 장궤양이 재발했다며 갑작스레 사임 의사를 밝힌 것이다. 청와대는 그 뒤를 이어 9월16일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를 상대로 “도쿄올림픽 성공 개최에 적극 협력하겠다”며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전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위기와 “관계 회복을 위한 계기를 한국이 만들어야 한다”는 스가 총리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서늘한 대치가 이어지는 중이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2019년 12월 청두에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두 나라 사이에 생겨난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는 이미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게 아닌가 우려하게 된다.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이라 이름 붙인 이 연재를 시작하며, 2018~19년 극에 달한 한-일 갈등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미 간 타협을 촉진해 한반도의 냉전 질서를 해체하려던 한국의 ‘현상변경 전략’과 중국의 부상, 북한의 핵개발에 맞서기 위해 역사 문제를 극복하고(12·28 합의) 한-미-일 3각 동맹을 공고화한다는 일본의 ‘현상유지 전략’ 사이의 충돌이라 설명했었다(2020년 7월15일치 24면 ‘좋았던 옛 시절로 왜 돌아갈 수 없는가’). 한·일 정상이 마지막으로 만난 지난 청두 회담의 짧은 머리발언에서도 이런 ‘화해하기 힘든’ 견해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비롯한 협력을 이어나가고, 동북아 평화와 번영에” 한-일이 함께하자고 호소했지만, 아베 총리는 “북한을 비롯한 안전보장 문제에 있어 일-한, 일-한-미의 연대는 극히 중요하다”고 밝혔다. 결국, 이 견해차를 양국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한-일 관계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현재 일본엔 한국을 바라보는 ‘세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첫째는 일본의 대표적 ‘지한파’ 지식인이자 전통적 리버럴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견해다. 와다 명예교수는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9년 11월2일 ‘일본기자클럽’ 강연에서 한국에 두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한국이 지난 위안부 합의를 존중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두번째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을 초대해달라는 것이었다. 와다 명예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성공을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지만, 한국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일본의 총리에게 ‘도와달라. 같이하자’고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한-일이 역사 문제를 극복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만들어나가자는 의견이다. 이 견해에 동의하는 일본인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 두번째는 <아사히신문> 등 중도 리버럴의 시선이다. <아사히신문>은 한-일이 서로를 향해 정면충돌하던 2019년 8월17일 ‘일본과 한국을 생각한다, 다음 세대에 건네줄 호혜 관계를 유지하자’란 제목의 장문의 사설을 게재했다. 이 사설의 핵심 주장은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12·28 합의를 존중하고, 일본은 2010년 간 나오토 총리가 내놓은 ‘간 담화’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이 담화에서 일본의 지난 식민지배가 “조선인들의 뜻에 반해 이뤄졌다”고 인정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아니지만, 최소한 ‘부당성’을 인정한 것이다. 양쪽이 이렇게 반씩 양보해 역사 문제에 마침표를 찍은 뒤, 북한과 중국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한-일 군사협력을 강화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입헌민주당 등 일본 야당이 공감할 것이라 판단한다. 마지막은 일본의 집권 세력인 자민당과 이들을 떠받치는 보수 주류의 견해다. 이들은 아베 총리가 ‘아베 담화’를 공개하기 직전인 2015년 8월6일 ‘21세기 구상간담회’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관을 집대성했다. 기타오카 신이치 도쿄대 명예교수 등은 이 문서에서 한국 ‘386세대’의 반일정서를 깊이 우려하며 “한국 정부가 역사인식 문제에 있어 ‘골대’를 옮겨”왔다고 지적했다.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양국이 함께 화해의 방책을 생각해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한-일 양국 정부가 ‘함께’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 12·28 합의였다. 그러나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12·28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하고, 이후 2018년 10월 대법 판결이 나오며 한-일의 대립 전선은 강제동원 피해 문제까지 확장됐다. 그러자 일본의 주류 보수는 한국에 대한 기대를 사실상 포기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런 심리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스가 정권의 신세대 외교·안보 브레인인 호소야 유이치 게이오대 교수의 견해다. 그는 2019년 8월18일 <요미우리신문> 기고에서 “한반도에선 문재인 정권이 남북통일에 대해 격렬한 정열을 보이고 있고, 한국 정치에 대한 북한의 영향력 확대라는 흐름이 관찰된다. (중략) 한국이 다시 감정적 행동에 나서도 일본은 보복하지 말고 냉정하게 자제를 촉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 정부의 배후엔 “일-미-한 안보협력의 파기와 미군의 한반도 철수를 요구하는 세력이 꿈틀거리고 있”어, 관계가 더 악화되면 이 세력이 ‘전략적 승리’를 얻게 된단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일본이 12·28 합의로 역사 문제에서 충분히 양보했으니 더 이상의 후퇴는 불가능하며, 한-미-일 3각 협력의 필요성 탓에 한-일 관계가 중요하긴 하지만, 여기에 지나치게 목맬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다. 아마도 대다수 일본인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2017년 4월 도쿄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한 뒤 그해 10월 펴낸 책 <아베는 누구인가>의 서문에서 “역사 문제는 접어두고 안보협력을 하자는 일본과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한국 사이의 갈등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지난 한-일 갈등은 “앞으로 닥칠 ‘거대한 불화’의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예측대로 한-일은 불화했고, 동아시아의 미래를 건 처절한 2018~19년 외교전에서 한국은 꺾였다. 이 복잡하게 얽힌 불신과 증오의 늪에서 극적인 ‘화해의 계기’를 찾아내긴 불가능하다. 서로의 ‘전략적 입장’ 차이를 이해하고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초인적인 자제력과 부단한 소통이 필요하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내길 기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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