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개발한 ‘들기지수’(NLE)는 무거운 물건을 들고 나를 때 생길 수 있는 허리 통증을 막자는 목적을 띠고 있다. 실제 들려고 하는 물건의 무게를 권장무게한계(RWL)로 나눠 산출한다. 지수가 1보다 크면 요통을 일으킬 수 있어 1 이하가 되게 작업을 설계·개선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권장무게한계 산출 때는 물건의 취급 위치와 횟수, 운반 거리 등을 따지는 6개 계수가 쓰이며 이 가운데 ‘결합계수’는 잡기 편한 손잡이의 유무를 반영한다.
같은 무게의 동일한 물건이라도 손잡이 유무에 따라 들기의 난이도에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물품 상자에 손잡이 구멍만 뚫어 놓아도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10% 가량 줄일 수 있고, 물건을 드는 자세까지 동시에 개선하면 최대 40%까지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택배 상자의 손잡이 구멍 문제는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바 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안전보건공단 지침을 들어 손잡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재갑 노동부 장관이 “대형마트 노동자들이 매일 나르는 상자에 손잡이를 만드는 방안을 빠른 시일 내 마련해볼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마트산업노조(마트노조)가 기자회견을 열고 무거운 상자에 손잡이를 설치하고 포장 단위를 소규모로 바꿔달라고 촉구한 터였다.
그 뒤 1년의 시일이 흐르는 동안 노동부 장관의 공언과 달리 변화는 없었다. 마트노조는 올해 추석을 앞둔 시점에서 1년 전과 똑같은 요구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는 “대형마트는 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구멍’ 하나 허락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택배 노동자의 잇따른 과로사도 변화의 계기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상자에 구멍 뚫는 게 그렇게 어려울 리는 없을 텐데 마트노조의 상대인 체인스토어협회 쪽은 난색이다.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는 판매 플랫폼일 뿐이라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내는 것은 상품 제조사의 몫이라고 설명한다.
제조업체 쪽에서도 난점이 있다고 한다. 손잡이 구멍으로 벌레나 이물질이 들어갈 수 있다는 위생 문제가 그중 하나다. 비용과 안전 문제도 있다. 상자에 구멍을 내면 아래쪽이 접혀 지지력이 약해지고, 상자를 높게 쌓을 수 없어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상자 재질을 바꾸는 식으로 일부 문제라도 풀자면 비용이 더 들고 소비자에 전가된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각 부문에서 비용을 조금씩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니, 결국은 돈 문제다.
개별 업체 차원의 비용 절감이 사회적으로는 택배 노동자의 건강 문제·사고·죽음과 그에 따른 사회적 손실이라는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유통사와 제조사 간 책임 전가와, 비용 문제 앞에서 법규는 무력하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665조)에는 ‘5kg 이상의 취급하기 곤란한 물품을 들어 올리는 작업을 할 경우 손잡이를 붙이거나 갈고리, 진공 빨판 등 적절한 보조도구를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돼 있다.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이는 택배 상자 손잡이 문제조차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으니, 이른바 공짜노동으로 일컬어지는 분류작업의 부담 완화나, 택배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 의무화 같은 더 큰 숙제는 언제쯤 해결될지 아득하다.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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